어릴 적, 명절 때마다 제사는 안 지냈지만 늘 전을 부쳤다. 할머니 댁 거실 바닥에 큰 전기 프라이팬 두어 개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진두지휘는 엄마와 작은 엄마 투 트랙. 아이들이 분업화로 전을 부치는 셈이었는데... 윗선에서 밑작업이 다된 반죽 양푼을 내려보내면 모양 팀이 그 반죽을 일정한 크기로 동글동글 빚어냈다. 그걸 계란물 팀에 넣어주면 계란물 담당팀은 작은 손으로 재빨리 건져내 지짐팀에 넘긴다.
손이 빠른 순, 연령대 별로 나뉜 나름 체계적인 라인업이었다. 노릇노릇 전이 부쳐지면 소쿠리에 놓이기 무섭게 2/3는 사라지고 마는 동그랑땡. 한 김 식지도 않은, 갓 부친 전에 입천장이 까질 정도였다. 하지만 다들 이번 텀을 놓치면 다음 텀까지 웨이팅이 길다는 캐치 하에 눈치껏 선점 후, 모두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상에 놓을 부침개 접시 몇을 마련하는데 기분상으론 한 나절 즈음 걸린 듯하다. 바구니당 한 장씩 깔아놓은 큰 글씨 달력엔 부침개에서 나온 기름이 베어 달력 숫자가 여실히 드러났다.명절날, 내게 전 부치기는 즐겁고도 기대되는 빅 이벤트였다.
이제는 명절 때에도 큰 집 식구들인 우리 가족들과, 작은 집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 밥 먹는 일은 없다. 우리 가족만 해도 13명 인 데다, 작은 집 가족은9명이었으니. 고모집, 둘째 작은 아빠집까지 모이면 할머니 집 안에 엉덩이만 따닥따닥 붙인 채 믹스커피 한 잔 하고 헤어져야할 규모.
명절 때도 모이지 않았던 가족들은 요 근래 해년마다 치렀던 장례식 때만 모였다.할머니, 할아버지의 장례식땐 지병 없이 90세 이상 천수를 누린 호상이라며 도란도란 앉아 술을 나눠 마셨다. 20대의 작은 집 소중한 아이가, 갑작스럽게 유명(幽明)을 달리 한 기막힌 일이 있어 그땐 통곡하는 와중에 술을 콸콸 들이부어마셨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 아빠의 일로 모이게 되었다.
근 3년 안에, 이런 사정들로간간히 만나 술을 마시긴 마셨기에 작은집 식구들과는 오랜만에 만나도 이물이 없었다.
다음엔 장례식 때 말고 결혼식, 좋은 일로 우리 만나는 거죠.
인사했다.
그런데 평소 호탕하시고 유쾌한 성격의 작은엄마 얼굴이 새초롬해졌다. 어두워진 얼굴빛으로, 고개 숙인 작은엄마가 꺾어마시는 술 한 잔 뒤로 구슬픈 배경음악이 깔렸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결혼식과 동시에 아파트 입주 문제로 신부가 될 사촌 동생과 의견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청약 당첨은 되었지만 7억 대의 신축 아파트로 들어가서 신접살림을 시작하고 싶다던 mz세대 사촌 동생. 작고 야물지 못한 손으로 계란물에 적셔 반죽을 넘겼던 계란물 팀 일원이 벌써 결혼을 하다니.
하지만 이 계란물 팀, 새 신부는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Uh, uh huh uh huh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로제가 팝스타 브루노 마스가 함께 부른 신곡 ‘아파트’(APT.) 배경음악을 깔고 마냥 신나보이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7억대의 아파트 자금을 어찌 감당할 것인지 뚜렷한 계획도 없어 보였 다했다.걱정하던 찰나, 시댁 쪽에서
(신접살림 시댁 이 층집 전월세 자금 필요 없이
무료 살이가능.
육아 도움 가능 + 밑반찬 등 제공)
제안을 주셨단다.
작은 엄마는 슬그머니 시댁의 이 층집 이층에서 딱 2년 간만,신접살림을 추천했다고 한다. 시댁 식구들도 당장 7억대 아파트를 어찌해줄 재간이 없으니...
그동안 바짝 아파트 자금을 모으고, 2년 후에 새 아파트에 입주하며 거기에 맞는 새 가전제품들을 들이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단칼에, 그 자리에서 거절당한 조언. 그런 연유로 작은 엄마는 윤수일의 아파트 배경음악을 처연하게 내리깔고 술을 연거푸 마시는 중이었다.
나는 지짐이 팀의 수장이자 같은 mz세대였지만, 딱히 뚜렷한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요새 답답한 마음에 술을 한 잔 털어마셨다. 내 머릿속으론 로제 아파트의 중독적인 후렴구 밴드 사운드가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7억이라는 숫자가 주는 현실적인 무게감이 와닿는다. '아파트'의 뮤직비디오가 발매 5일 만에 1억 뷰를 돌파로 연일 화제라는데... 보통의 집에서 7억을 모아 현금으로 아파트를 장만하려면 50년의 세월이 가당키나 할까. 막상 내 입 밖으로 나온 건 윤수일의 아파트 노래였을 테다.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
술을 몇 잔 마시며 작은엄마의 고충에 맞장구를 치다 보니 어렴풋이 그 자리에 없던 엄마가 보였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구름처럼 머물지 못해 독일로 간 엄마.
나 때는 말이야... 할아버지 댁에서 신접살림 몇 년, 단칸방 셋방살이 몇 년, 15평 주공 아파트 몇 년...
할아버지 댁에서 신접살림을 차리고선 몇 년동안이나 대가족 식사 제공을 위해 이른 새벽녘 아궁이 불 붙이러 나갔다는 새댁. 먼저 나와계셨던 증조할머니를 발견하고서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옛날 옛적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