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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Oct 18. 2021

여전사 엄마

독침 대신 달팽이 치즈 눈알

떨리는 손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상황에선 유독, 전화도 연결되지 않는다. 무심히 통화연결음만 이어졌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샤르자에 닿아있었다. 나도 모르게 stooooooop!  을 외쳤다. 배에서부터 깊은 울림이 쏟아져 나왔다. 극도로 긴장한 탓에,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내가 절정에 이르기라도 한 듯. 튀니지 인 기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했다. 트렁크에서 내 짐을 꺼내 들려는 중이었다. 다시 한번 Stooooooooop!!!      


(그... 그..... 그 손으로, 내 물건 만지지 마!!!!!!!!!)   

  

손수 짐을 내렸다. "너 택시 회사에 전화할 줄 알아!! 오늘, 이 공간에서 있었던 일! 컴플레인 걸 거야!!!" 협박했다.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 들썩거리곤 유유히 택시로 돌아갔다. 지극히 협소한 공간에서 타인의, 그것도 내 생에 처음 만난 튀니지 남자의 사적인 행위를 함께 하다니. 치욕스럽고 분했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는 단지 목적지를 향해 운전했을 뿐이었다. 혼자, 스스로의 욕구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19금 야릇한 농담을 던지지도 않았고 내 몸에 손가락 하나 얹지 않았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공포스러웠던 위기 상황이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 몇 있었다.      


- 되도록 혼자, 택시에 타지 말 것.

- 절대, 택시 조수석에 타지 말 것.

- 미혼이라도_항상 반지를 착용할 것.

- 결혼 여부 질문엔 늘 결혼했다고 답할 것.

- 가능한 한, 여성 운전자 택시를 미리 예약해서 탈 것.

    

두바이 택시회사로 전화를 걸어 컴플레인을 해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기사가 비웃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전화로, 그것도 영어로_ 급박했던 당시 상황과 내가 느꼈던 모멸감과 수치심을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상담원은, 내 억울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들어줄만한 의지가 없었다. 결국 제 풀에 지쳐 먼저 전화를 끊었다. 반지를 착용하는 대신 청양고추를 풀어넣은 스프레이라도 지니고 다녀야 하는 걸까 한참을 고민했다. 아득한 아랍 땅에서, 나를 지킬 수 있을 방법에 대해 더 고심해봤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




범죄·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는 남편 님의 취향 덕에 의도치 않게 꽤 여러 작품들을 섭렵하였다. 두 아이들 사이에서 옥신각신, 겨우 재우고 소파에 앉은 건 나인데... 육퇴 시네마 앞에 앉으면 어떠한 설명도 없이 범죄 영화가 플레이되는 거다.


그나마 가장 통쾌하게 봤던 '악마를 보았다.'였다. 잔인한 영화였다. 하지만 약혼녀를 잃은 국정원 직원 이병헌이, 잔인무도한 범죄자 최민식에게 벌이던 복수 씬이 좋았다. 뉴스로 접하는 현실에서의 아동·청소년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미미하다고 생각되어서였을까. 아이 키우는 입장이 되고 보니 더욱 안타까울 때가 많았다. 그런 사건들일 수록 응징은 늘 빠르고 정확하게 해야 하는데 말이지. ‘악마를 보았다’에서처럼 죽을 만큼의 고통만 가하고 놓아주기. 하지만 마무리는 처절하게.




영화 더블크라임



가끔 여전사가 되는 상상을 한다. 지나친 노파심으로 매사 걱정을 늘어놓는 초보 엄마가, 또 오버스러운 상상력으로 여전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만약'이라는 가정법으로 시작되는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엄마는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영화 -'더블 크라임'에서의 애슐리 쥬드 같은 외모의 엄마면 좋겠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아들을 찾아 나서는 애슐리 쥬드보다는 더 전투적인 것으로 한다. 뒷목에 독침을 쏘기도 하고, 샤샤샥 재빨리 이동했다가 급소를 공격해서 순식간에 제압하기도 해 본다. 절제된 동작 몇 번만에, 상대의 목에 권총도 겨눈다. 갑자기 전투력은 이병헌 급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치맛자락을 잡아당긴다.


(엄마아아, 내 말 못 들었어????!)




치즈에 빨대를 꽂고 '훅' 불어서 만든 꽃 씨방.




상상 속의 여전사는 어디로 가고, 목이 늘어진 수유티를 입고 앞치마를 두른 내가 서있다. 심심하다며 보채는 아이에게, "얌전히 잘 있어야, 소풍 도시락을 싸주지!

계속 까불면 소풍은 못 가는거야아!!! 엄마랑 집에 같이 있어야 해!!!" 협박한다. (애초에 집에 같이 있을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동영상을 하나 틀어 가까스로 소파에 앉혀놓는다.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 빨대를 꺼내 든다. 빨대를 입에 물고 치즈에 갖다 대고 찍어 작은 구멍을 만든다. 빨대 구멍에 치즈 조각이 끼어지면 '훅'하고 바람을 불어넣는다. 뒷목에 독침을 쏠 때, 이런 느낌일 테지?! 작은, 치즈 동그라미가 빠진다. 소풍 도시락에서, 달팽이 눈이 되고, 꽃의 씨방이 될 작은 원이 때구르르 굴러간다.




치즈와 빨대로 만든 동그라미에, 검은 깨를 붙여서 눈을 만든다




도시락 뚜껑을 닫으면서 아이들에게 말한다.


"달팽이 김밥 뒤집어지면 안 되니까, 가방 메고 절대로

뛰면 안 돼!"


엄마는 그냥, 걱정이 많다. 김밥을 싸는 그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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