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여희 Oct 16. 2021

두바이, 변태 택시 드라이버

육퇴 시네마 

밤 9시가 되면 시계를 힐끗거린다. 아직 들뜬 열기가 가시지 않은 아이들을 채근한다. '이제 자야 할 시간이야.' 밤 10시가 되면 안달이 나기 시작한다. 설득의 연속과 분노 일보 직전 사이에 서있다. 밤 10시 반. '얼른 자지 못해!!!' 후다다닥. 이불속으로 숨는 소리가 잽싸다. 한참 동안 이불 밑으로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린다. 사각사각거리는 소리가 잦아들고 새근새근 숨소리가 찾아든다. 하루의 끝.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 괜히 불을 켜든다. 곤히 잠든 아이 얼굴을 들여다본다. 상기된 볼에 얼굴도 대어 본다.


오구오구 내 새끼.


아이들이 잠든 방문이 닫히고 나면 부부는 약속이나 한 듯 발 빠르게 모여든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오징어를 굽고 차가운 캔맥주 꺼내어 든다. 간장이 든 종지에 마요네즈를 짜고, 청양고추를 쫑쫑 썰어 넣는다. 운이 좋은 날엔, 육개장 컵라면 한 사발이다. 끊인 라면은 번거로우므로 삼가기로 한다. TV 앞에 나란히 앉은 부부는 매일 밤 육퇴 시네마를 오픈한다. 19금 영화나 로맨스 영화는 상영하지 않는, 육퇴 시네마. TV를 보다가, 소파 위로 둘이 하나 되어 쓰러지는 일은 결코 없다. 엔딩크레딧이 오르는 그 순간까지 영화에 집중하는 끝까지 집중하게 되는 순전한 영화관.




두바이 시내



나는 유독 온몸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이다.  작가에게 훈수를 두기도 하고 배우에게 말을 건넨다. 손수 대사를 치거나 액션을 연기한다. 그건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음성이 나오면 함께 뛰었다가 이내 잦아든다. 스페인 은행에 잠입해선 열심히 총을 쏘아댄다. 군부대 탈영병을 찾아 짠한 마음으로 어르고 달래기도 한다. 액션뿐만이 아니다. 엄마 열혈 시청자가 특히 몰입하는 장르는 위험에 빠진 아이를 찾아 나서는 엄마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볼 때다. 늘 그런 역할에선 더 몰입해서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현실에서 난 어떤 엄마일까. 영화 '나를 찾아줘'에서 나오는 이영애 님 정도로 대응이 가능할 평범한 엄마가 아닐까. 아이를 잊어버리는 일도 없어야겠지만 아이 잃은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계가 있을 테다. 아이 찾는 전단지를 붙이고 제보 연락을 받으면 찾아 나서고. 제보된 장소 근처의 사람들 몇에게, 아이에 관해 묻는 정도겠지. 몰래 숨어들었다가도 마땅히 준비해갈 무기 따위는 변변치 않다. 한낮 평범한 여자가, 우연히 위기상황에 맞닿드리게 되었을 때 발휘할 수 있는 위기 대처능력은 어느 정도 될까. 







처음 두바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다. 나를 먼저 반겼던 건 숨이 턱 막히게 하는 더위였다. 그리고 나를 응시하는 시선들. 아랍 전통 의상인 브루카 burka를 입고 눈만 내놓은 아랍의 여인들 속에서, 동양 여자의 반팔티마저도 관심을 끌기 충분한 듯했다. 서둘러 택시를 탔다. "샤르자 sharja로 가주세요." 아랍 에미레이트는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아즈만, 푸자에라 등의 7개의 토후국으로 이루어진 연합국이다. 에미레이트 연방 내에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요금이 더 추가되는 정도다. 두바이 공항에서 sharja 목적지까지는 40분 남짓 달려야 하려나... 택시기사는 트렁크에 짐을 실어주곤 뒷 좌석에 앉아있던 내게 물었다. 


"샤르자 지리를 잘은 모르는데, 옆 좌석에 와서 길 좀 알려줄래?"


나 역시 두바이나, 샤르자의 지리를 잘 알 턱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초행길 티를 내고 싶지 않아 그러마 했다. 조수석에 앉았다. 택시기사는 튀니지에서 왔다고 했다.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인지,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외국인과 영어 프리토킹하는 마음으로 질문들에 살뜰히 응했다. 당시 아랍 사람들, 특히 두바이의 여자들은 한국 아이돌이나 배우들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아이돌 안무까지 다 외울 정도였고 두바이 시내 한복판에선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울려 퍼졌다. 부르즈 칼리파 빌딩을 세운 삼성으로 인해 한국의 이미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한국에 대해 묻는 질문들엔, 외교사절단 대표라도 되는 양 조근조근 대답해줬다. 하지만 두바이 공항에서 샤르자의 친구 집으로 가는 길은 꽤 멀었다. 초반에의 대화는 점점 잦아들었다. 택시 안에 침묵이 감돌 무렵, 점점 시내를 벗어나 인적 드문 사막길을 달리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떨어져 밖은 깜깜해졌다. 







그런데 옆 좌석에서 사부작사부작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황량하게,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배경으로 전봇대들만이 눈에 들어오는 정도였다.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진 않고 곁눈질로 힐끗거려봤다. 택시 기사 녀석의 조물락조물락 마스터베이션 현장을 감지할 수 있었다. 'Oh my goooooood.' 기껏해야 프라이드 정도 될 사이즈의 비좁은 택시 안에 있는 건, 튀니지안 택시기사와 나뿐이었다. 


(그런데 저 나쁜 손은 대체 어디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까... 신이시여. 인샬라.) 


불경스러운 순간에, 엄마라는 단어는 담기도 싫었는지 OMG가 새어 나왔다. 연신 하악하악 숨소리 들렸다. 언제든 클라이맥스가 나올지도 모르는 그런 순간. "그런데... 튀니지에 가족들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여전히 효과음은 나른하게 계속되었다. "응. 튀니지엔 우리 아들만 있어. 와이프랑은 이혼했고." "그럼 아들은 누가 키워? 아들 보고 싶겠다~" 


(고향땅은 떠나왔을지언정 부모임을 잊지 마. 나도 우리 엄마 소중한 딸이야..... 이 새끼야.)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열중 모드였다. 잦아들 기새 없이 집중력이 좋았다. 자동차 속도계의 km가 올라가는 동안, 조물조물하던 그의 손놀림에도 점점 속도감이 붙었다. 나는 거의 조수석 창문에 들러붙을 기세가 되었다. 등이 흥건히 젖었다. 불안하던 내 시선은, 조수석 쪽 문고리와 여전히 캄캄한 창 밖, 그리고 속도계 쪽으로 옮겨갔다. 그러다 문득 택시기사의 유난히 희번덕한 눈동자와 맞닥뜨렸다. 외마디 소리가 나올 뻔했다. 잠시 생각했다.


(이 놈이 갑자기 사막에 차를 세우고 달려들기라도 하면 어쩌지.) 


불현듯 최근에 들었던 이야기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부다비의 영국인 기장 집에서 일하던 필리피노 메이드 하나가 장 보러 갔다 온 사이 사막으로 납치되었다고 했었다. 로컬 아랍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해 가까스로 풀려났다고 했다. 정의감에 불타던 기장이 소송을 걸었지만 오히려 필리피노 메이드만 태형을 맞고 추방당했다는 이야기. 남편이 아닌 외간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였다. 나의 걱정 어린 상상은 극에 달했다. 속도 170km로 달리는 차에서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내린다면... 영화에서처럼 난 낙법으로 뒹구르르 구르다가 무사히 착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충격 강도가 심할 테지. 도대체 언제 도착하는 걸까. 유난히 사막의 길은 무섭도록 길었다. 10분 같은 1분.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