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엄마, 할머니

한 다리가 천리다.

by 김모씨

"결혼한다고 아빠 제낄생각마라."

결혼식 날짜를 잡고 난 후 할머니가 전화로 했던 말.
두 번째 재혼해 사는 아빠는 금전적 여유가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하고 싶은 말은 반드시 하지만 할머니 사전에 축하한다는 말은 없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듣기 싫었던 말들은 마음속에 점점 더 오래 남아서 요란하게 굴러다니고 있다. 아빠와 고모들은 할머니의 치매가 걱정이라는데 지금 상황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2020년 올해 2월까지는 정신이 온전하셨다고 확신한다. 한 다리가 천리라는 말이 찰떡같은 사람. 이년 전 외할머니 장례식장에 있는 나에게 몇 번이나 전화해 외할머니와 엄마에게 나와 동생이 받은 거라곤 하나 없는데 왜 거기 가 있냐며 당장 오라고 화를 내다가 나중에는 울먹이며 애원하듯 말했던 사람. 내 앞에선 멀쩡하다가도 자식들 앞에서 유독 아픈 아기가 되어 눈물을 보이는 사람. 그게 바로 우리 할머니다.


몇 년 전 추운 겨울밤 할머니는 저녁이 늦은 아빠를 위해 재빨리 김치볶음밥과 동치미를 내어왔지만 아빠는 양이 너무 많고 짜다며 음식을 남긴 채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동치미가 얼마나 시원한데 입에 대지 않냐며 투덜거린 할머니가 무를 크게 한입 베어 먹고 이빨 자국 선명한 무가 둥둥 떠있는 얇은 스테인리스 그릇을 나한테 내밀었던 순간이란!


동치미는 맘 속에 깊이 묻혀 있던 기억의 줄기에 매달린 첫 번 째였을 뿐.

집에서 먹고 남은 거의 모든 음식은 아빠와 할아버지 밥상은 건너뛰고 항상 나와 동생에게 와 있었다. 너무 졸여져서 질긴 갈비, 숟가락 자국이 선명한 먹고 남은 계란찜, 숙모와 동생과 내가 가장 싫어하는 제사 때 쓸 전을 다 부치고 남은 재료로 섞어 부친 전(!!!) 등등 더 쓰고 싶지만 꾹꾹 참는다. 물론 이 음식들에 사랑이 없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정말이다. 다만 아빠와 이혼 한지 십 년은 훌쩍 넘은 엄마가 요즘도 종종 할머니가 주지 않았던 홍시와 엄마 몫의 대접에 닭고기 없이 죽만 있던 멀건 삼계탕을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것을 어딘가에 기록해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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