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듯 한 휴직, 오히려 나에겐 독이었을까?

쉬는 법을 몰랐던 나에게 필요했던 건, "나를 돌보는 시간"이었다.

by 솔직히

휴직을 한 지 몇 주가 지났다.

일터만 벗어나면 마음이 편안해질 줄 알았는데 바쁘게 쳇바퀴처럼 살던 삶이 계획없이 멈춰버리니 막상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 지 막막했다.

대책도 없이 사직서를 내버린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이었는지, 사직서가 수리되었다면 내가 얼마나 후회했을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회사를 다닐 때는 6시만 되도 눈이 떠져서 내가 잠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휴직을 하고 가야할 곳이 없게되자 잠이 얼마나 쏟아지던지 하루종일 정말 잠만 잤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시간 개념이 없어질 정도로 하루종일 잠을 잤는데도 계속 잠이 왔다. 집에서 자고싶을 때까지 늦잠을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싶은 걸 먹고 하는 생활은 나에게 죄책감을 심어주었다. 회사를 꾸역꾸역 다닐 때는 그래도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가 밦값은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집에서 밥만 축내고 게으른,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서른이 괜히 부모님의 눈치가 보였다.


회사 다니는 것도 힘들어서 쉬는데, 쉬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다니.. 나는 정말 답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또 자책을 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일단 멈추고 나온 상태라고 생각했기에 빨리 다른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야 하는 하루하루를 이렇게 무계획적으로 보내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다른 사회생활에 비해 공무원조직은 순한 곳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도 힘들어하는 내가 다른 곳에 간다고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겁을 잔뜩 먹었기에 더더욱 무언가를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금 더 버텨봤어야 했는데 하는 자책과 함께..

다른 직렬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려 강의를 들어보기도 하고 그동안 배워보고 싶었던 것들을 배워볼까 하다가도 지금은 너무 늦은것 같다는 생각과 두려움이 들어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와중에 마음이 헛헛해서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으며 배가 터질 것 같을 때까지 배를 채웠다.


그날도 하루종일 핸드폰을 끼고 누워있다가 문득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는 첫째인 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은 막내역할을 할 때가 많았다. 알바를 하거나 이런저런 모임을 나가면서 좋은 언니들과 친구들을 많이 알게 됐었고 생각나는 대로 나의 상황과 막막함을 담은 카톡을 보냈다.

나에게 온 답장들을 보면서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보다 세상을 더 살아본 지인들, 그리고 나와는 다른 시야로 세상을 살아가는 친구들이 공통적으로 나에게 해준 이야기는 "일단 쉬어봐."라는 이야기였다.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온 것에 대해 자책하는 나에게 한 언니는 이렇게 얘기해주었다.

"00아,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도망칠 수 있어. 네가 하지 않아도 그 일을 누군가는 할 수 있는 일이고 감당하지 못할 일을 배정한 시스템과 사람들도 책임이 있는걸.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생각하지 마. 그 사람들은 잘 해도 칭찬해줄 사람들도 아니고 인생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야.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봐. 꼭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하루를 보내봐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비생산적으로 하루를 보내보는 거야. 그러다보면 무언가 할 수 있는 힘이 생길 수도 있어. 대신 운동은 열심히 하고 밥 맛있게 먹고 잠은 잘 자야 해!"


하루종일 잠만 자는 내가 너무 한심스럽다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언니도 있다.

"그동안 극도로 긴장감이 유지되어있어서 잠이 쏟아지는 거니까 원없이 자봐. 어차피 관둘 수 있는건데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성인인데 6개월이라는 방학이 생긴거라고 생각해보자. 생각을 많이 하는것보다는 비워내는게 00이가 해야할 일 같아. 무기력할 때 생각없이 잠도 자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해보는거지. 뒤로 물러나보면 별 일 아닌 일들도 많아."


마지막 근무지에서 팀장님의 말에 상처를 입어서 나오며 '내가 죽어도, 다시는 이 조직에 돌아갈 일은 없을거야.'라는 마음을 먹었었다. 소문이 중요한 이 조직에서 이미 나는 폐급이라고 낙인이 찍혔을 것이고 아무도 나와 함께 일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근무하면서 이전 부서와 팀 사람들을 보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껄끄러웠다. 무엇보다 돌아간다고 해도 내가 과연 이 조직에서 1인분의 몫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내 역량에 대한 부족함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서 생각해보니 내가 휴직하기 직전 내가 맡은 업무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업무가 맞았던 것 같다. 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지만 연차와 경력 그리고 개인의 역량에 따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감당하기 힘든 일은 있다. 핑계에 불과한 말일지라도, 내 전임자와 전전임자의 경우 나보다 최소 2년 이상은 선배였고, 출장이 잦은 업무에 필요한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도망쳐 나온 나도 비겁하지만 팀원이 적응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없이 팀배치를 한 윗분들의 책임도 일정부분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책만 했던 내가 이번 기회에 남탓도 해보니 정리되지 않은 내 마음 한구석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 이 조직에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원래 사람은 힘들때는 나만 보이는 법이니까, 돌아가서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나를 따라다닐 소문의 연기도 조금 지속되다 끊길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만 뻔뻔해져도 되지 않을까?

항상 편집된 영화 요약본만 보았던 내가 오랜만에 보고 싶었던 영화를 골라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

대학생 이후로 맞은 방학, 나에게 자주 찾아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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