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악상을 지닌 채 살아간다고 나는 믿는다.
어떤 이는 알레그로로 살아간다. 기민하고 재빠른 발걸음, 쉼표보다 음표가 많은 인생. 모든 것이 약간 빠르고, 조금 더 선명하다. 예측과 판단이 빠르며, 정답에도 경쾌하게 도달하는 듯 보인다.
세상은 이 빠른 악상에 익숙하고, 또 그것을 정답처럼 여긴다.
어릴 적부터 ‘천재’라 불린 이들은 대부분 알레그로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청음 한 번에 곡을 암기하고, 손이 빠르며, 또래보다 앞선 리듬으로 움직인다.
그들에게 우리는 열광하고, 그것이 곧 재능이며 ‘잘함’이라 여긴다. 빠른 음악을 더 빨리 연주하는 사람은 박수를 받고, 조금 늦게 도착한 사람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존재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음악은 속도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느린 악상이 빠른 악상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한다. 느린 진행 속에 담긴 짙은 감정의 농도, 주저함 속의 고뇌, 쉼표에 담긴 여백.
아다지오로 살아온 삶에는, 오래 들여다본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나는 느린 악상을 가진 이들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시험에 늦게 붙고, 연애를 늦게 시작하고,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유예하는 사람들. 세상은 그들을 ‘늦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다른 악상 기호로 쓰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같은 악보도 악상에 따라 전혀 다른 곡처럼 들린다.
안단테는 걷는 사람을 닮았고, 안단테는 고뇌하는 인간의 호흡처럼 들린다. 프레스토는 단숨에 전진해 무언가를 해결해주는 듯 명쾌하나, 아다지오에는 인내가 있다.
내용보다 중요한 건, 그것을 어떻게 살아내는가.
그러니까 어떤 속도로, 어떤 마음으로 통과하는가 하는 것.
이 사회는 속도에 기준 삼아 사람을 재단하려 한다. 몇 살에 대학에 입학하고, 언제 취업하고, 결혼하고.
모든 것을 단일한 템포 안에 배치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180에 맞춰진 메트로놈이 아니다.
빠른 것이 정답인 시대에, 나는 갈수록 느린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안단테의 발걸음, 아다지오의 여유와 인내.
빠르지는 않으나 끝내 도달하는 그들의 사랑스러운 악상. 그 느린 악상 안에는 조급함 없는 정확함이 있고, 빠른 세상과 어긋난 자유가 있다.
분명히 사람마다 가진 악상은 다르다.
누군가는 프레스토로 질주하듯이 살아가는 반면, 끊임없이 고뇌하며 아다지오로 사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그 박자가 정말 그 사람의 것인가,그 사람이 본인의 음악을 들으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삶이 음악이라면, 우리는 각자의 해석으로 세계를 연주하는 존재다.
정확함보다 감도, 정량보다 정서가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
느린 이들은 세상이 아직 도착하지 못한 속도로, 자신만의 템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템포로 살아간다면, 음악은 얼마나 지루할 것인가. 그리고 세상은 또 얼마나 따분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