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마타
클래식 음악을 듣다 보면 문득,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이 있다. 모든 악기가 숨을 고르고, 지휘자의 손끝이 공중에 정지한 채 고요를 붙잡고 있는 찰나. 그 멈춤을 “페르마타(fermata)”라고 부른다.
페르마타는 이탈리아어로 ‘멈추다’, ‘지속하다’를 뜻하는 단어로, 악보 위에서는 반원 위에 점이 찍힌 기호로 나타난다.
이는 연주자에게 지금 이 순간, 정해진 박자에서 벗어나 머물러도 좋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얼마나 머무를지는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다. 지휘자의 해석 혹은 공연장의 울림, 감정의 무게에 따라 그 길이는 달라진다.
(사진 1. 페르마타)
이처럼 시간의 유예, 혹은 박자에 대한 유연한 해석은 페르마타 외에도 루바토(rubato), 카덴차(cadenza)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루바토는 프레이즈의 속도를 자유롭게 흔들며 흐름에 ‘숨결’을 불어넣는 방식이라면, 페르마타는 악보에 명시된 멈춤의 지점에서 모든 연주자가 동시에 호흡을 고르는, 공동의 쉼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페르마타는 의도된 머무름이며, 때로는 서로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영어권에서는 이 기호를 “bird’s eye(새의 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이 기호의 모양이 눈을 닮았기 때문에!
지금은 연주를 멈추고, 지휘자 혹은 협연자를 바라보라. 소리를 멈추고, 눈을 맞추라.
음악은 각자 멈추지만, 그 멈춤은 모두가 함께 이어져야만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페르마타는 제각기 다른 속도로 달려가던 음악을, 다시 하나의 호흡으로 묶는 시선의 합이다. 연주는 멈췄지만, 연주자와 지휘자, 협연자의 눈은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연결이 다음 소리를 가능케 한다.
바로크 시대에는 페르마타 위에서 연주자가 즉흥 카덴차를 연주하는 것이 관례였고, 고전주의 이후에는 감정을 강조하는 장치로 더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낭만주의에 이르러서는 절정, 이별, 죽음과 같은 감정의 결절점 앞에서 음악이 스스로 말을 멈추는 방식으로 쓰였다.
어떤 페르마타는 몇 초면 지나가고, 어떤 페르마타는 영원처럼 느껴진다. 관객도 함께 멈추고, 숨죽이며 기다린다. 그 여백의 떨림 속에서.
우리 삶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다.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 감정이 너무 벅차 말을 잃을 때, 무언가를 끝내야 할지, 아니면 조금 더 안고 가야 할지 모르겠을 때.
사람들은 흔히 그런 시간들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멈춘다는 건 나약함이고, 도태이며, 실패라고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 “아직은 이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는 감정은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진 2. 쉼표에도 페르마타가 있다.)
하지만 음악은 말한다.
“모든 소리는 울림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리고 그 울림을 충분히 기다릴 때, 음악은 비로소 풍성해진다.”
지나친 성급함은 그 울림을 놓치게 만든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사라지기 전에 한 번쯤 머무를 자리를 필요로 한다.
페르마타는 허락이다. 연주를 당장 이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복합적인 감정을 급히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리고 당신의 삶이 지금은 잠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다는 허락.
그러니 지금 당신이 머물러 있는 그 자리, 그건 실패도, 도태도 아니다. 그저 음악이, 감정이, 관계가 당신 곁에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부디 서두르지 말고, 조금 더 오래 그 자리에 머물러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