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클래식은 외국에서 배워야 할까?

한국에서 사랑하고 외국에서 증명한다

by 서유진


임윤찬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

사람들은 국내파의 저력이라며, 유학을 가서 클래식을 배우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해외로 갔다. 그건 너무나 이해가 되고 자연스러운 선택인 동시에 어딘가 서늘한 구조를 드러낸 일이었다.



음악은 국경이 없다면서, 배움에는 왜 국경이 있나


사람들이 흔히 말하길 음악은 보편의 언어라고 한다.

언어를 몰라도 음악으로는 통할 수 있다고.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이 보편의 언어인 음악을 제대로 배우려면 그 끝은 언제나 외국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클래식의 뿌리를 찾으려면 유럽으로, 그 뿌리를 어떻게 뻗을지 고민하려면 미국으로 가라고 말한다.


실력 때문일까? 교사, 교육 환경, 시스템의 차이?


그보다 더 본질적인 건

“거기서 배워야 진짜라는 믿음” 아닐까.


클래식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예중 - 예고 - 음대 - 유학의 ‘엘리트 코스’를 밟게 된다.

이중 예중이나 예고를 나오지 않았더라도, 음대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끝은 언제나 “유학가야죠”로 귀결된다. 그 말 속에는 “클래식의 본고장이 아닌 한국에서는 완전한 걸 배울 수 없어” 라는 일종의 믿음이 작동하는 것 같다.


클래식의 배움은 도제식이다.

사제 관계, 큰 선생님과 작은 선생님. (큰 선생님은 보통 작은 선생님의 선생님이다.)

‘누구에게 배웠는가’는 어쩌면 무엇을 배웠는가보다 더 중요한 인증이 된다.

실력은 손끝에서 나오지만, 평가는 사제를 따라간다.


그렇기에 ‘유학’은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닌 마치 정통성과 계보를 잇는 무언가처럼 기능한다.

“걔는 누구를 사사했다더라.“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그가 어떻게 연습했는지에 앞서 누구 밑에 있었는가로 평가받는 세계.


이 권위의 구조 속에서 한국은 늘 2차 수신지가 된다. 아무리 잘 가르쳐도 그 스승이 또 어디에서 배웠는가를 끝끝내 추적당하는 문화. (좋은 연주자가 꼭 잘 가르치는 선생님은 아닌데도)


그래서 그들은 떠난다. 배우기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그 도제적 구조에 ‘속했다’는 증명을 위해서.


왜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클래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충만하면서도, 그 음악을 제대로 하려면 반드시 외국으로 가야 한다고 믿는 걸까?


왜 음악은 마음의 언어라면서 배움은 여전히 그 외의 요소들에 따라 그 무게가 달라지는 걸까?


음악은 분명히 내 곁에 있지만, 그 음악을 완성시키는 공간은 늘 저 바다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그 감정이 우리 개개인의 선택을 넘어서 문화 자체에 각인된 거리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의 방향은

항상 바깥을 향한다. 그 감정의 기원에는 지금도 굳건히 자리한 도제적 권위 구조가 있다.

나는 무대 밖에서 아직도 그런 질문을 한다.

내가 연주하지 않더라도, 음악을 듣는 동안 자꾸만 이 거리감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왜 우리는 아직도 떠나야만 배운다고 믿는지.


어째서 음악은 이토록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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