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부서진 기억들이 꾸는 꿈

요시모토 바나나의 『암리타』를 읽고

by 서유진


사람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잊어버릴 때, 비로소 자신으로 태어난다. 배우였던 여동생을, 그리고 사고로 기억을 잃은 주인공 사쿠미는 과거 일상을 지배했던 부분들과 불가사의한 체험 사이를 오가며, 생과 사의 경계를 그녀만의 속도로 마주한다. 서사보다도 꿈의 파편 같은 이미지와 감각에 의해 굴러간다.



옛날, 친구 집에서 냉장고를 열었는데, 빨갛고 둥글고 커다란 것이 들어 있었어. 잘 알고 있는 것인데도 순간 무엇인지 생각이 안 나더군. 그것은 수박이었지. 프루트 펀치를 만들려고 껍질을 벗겨두었다는 거야.
꽤 애를 먹었을 텐데 왠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그게 수박인 줄 금방 알지 못했다는 점이 우스웠어. 그때 느낌하고 비슷해. 그렇게 변했어.


『암리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로맨스나 주인공의 성장담이 아니다. 로맨스적 요소가 있으나, 그것은 삶의 불가해성과 영혼의 지속성을 탐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암리타”라는 신화적 불멸의 상징은, 결국 인간이 기억과 관계를 통해,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을 이어가는 방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여겨진다.


아쉬운 점은, 이 모든 장치가 치밀한 서사 구조로 엮이지는 않는다. 1인칭 시점은 주인공의 감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만, 동시에 플롯을 느슨하게 만들며 독자에게 일종의 산만함을 남긴다. 그러나 이 결핍은 작품의 약점이자 의도된 효과다. 삶과 기억, 인간의 정체성 자체가 원래 불완전하다면, 그것을 담아내는 소설의 형태 또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이 불완전성이 곧 작품의 미학이다. 보수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서사적 설득력이 부족해 보이지만, 그 빈틈 속에서 삶의 본질적 불가해성이 드러난다. 소설은 독자에게 “기억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타자와의 공명”이라는 통찰을 남긴다.


『암리타』는 분명 매끄럽게 완성된 걸작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산만함 속에서도 문득 드러나는 진실, 불안정성 속에서 솟는 울림. 이 모순이야말로 요시모토 바나나 문학의 힘이다. 독자는 설명되지 않는 삶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는 형식 속에서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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