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의 두 가지 환상
사람들은 환상을 원하는 동시에, 원하지 않는다.
오늘날, 클래식 연주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두 단어가 있다. ‘독창성’과 ‘즉흥성’.
연주자의 유일무이한 해석, 무대 위에서 순간적으로 솟는 영감, 그리고 청중이 “오늘만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연주”라고 믿는 그 환상이다.
그림 1. John Howitt, Ashcan School
독창성의 허상
클래식 연주자는 작곡가가 남긴 악보를 연주한다. 이미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연주자가 같은 곡을 연주했고, 그 해석들이 층층이 쌓여 하나의 전통을 이뤘다.
그렇다면 ‘독창성’은 어디서 오는가?
실제로 연주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템포를 조금 조절하거나, 프레이징을 나누고, 음색을 선택하는 정도. 이는 차별화된 해석이지 창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독창적인 연주”라는 말을 쓴다. 결국 이 표현은 공연 산업이 만들어낸 언어, 청중이 소비하는 작은 뉘앙스의 차이를 장식하는 마케팅에 가깝다.
소멸된 즉흥성
과거의 음악 문화에서는 즉흥성이 실제로 존재했다. 리스트나 파가니니와 같은 작곡가-연주자들은 무대 위에서 주제에 따라 즉흥 연주를 선보였고, 관객은 그 자유를 기대하며 연주장을 찾았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악보 숭배와 작곡가 개념이 확립되면서 즉흥성은 점점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오늘날 청중은 ‘즉흥성’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는 곡”을 정확하게, 안정적으로 듣고 싶어한다. 지나치게 자유로운 루바토나 파격적 해석은 자칫 불온하고 오만한 것으로 간주된다. 청중이 기대하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이미 음반과 악보로 규범화된 모델의 더 세련된 재현이다.
그림 2. 작가 미상, 파가니니 그림
현대곡의 배제
이런 태도의 필연적 귀결은 현대음악의 소외다. 진정한 ‘새로움’을 제공하는 것은 살아 있는 작곡가들의 작품이지만, 많은 청중들은 이를 원하지 않는다.
솔직히 이 글을 쓰는 나조차 현대음악은 불편하게 들린다. 듣기 좋은 음악, 누구나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음악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러나 같은 이유로 미지의 것, 아직 규범화되지 않은 해석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따른다. 결국 클래식 연주회는 과거 레퍼토리를 반복 재생하는 오르골이 된다.
환상의 역할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어떤 연주를 ‘독창적’이라 부르고, ‘즉흥적’이라고 묘사한다. 이 단어들은 어떤 연주자나 연주를 묘사하기보다는, 그 결핍을 은폐하는 장치에 가깝다. 더 이상 진정한 즉흥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 말을 쓰고, 진정한 독창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연주를 독창적이라 부른다.
클래식 음악은 본질적으로 과거를 소환하는 예술이다. 청중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익숙한 감동의 재현을 기대하고 공연장을 찾는다. 그리고 그 위에 덧칠되는 말이 ‘독창성’과 ‘즉흥성’이다. 현실이 아닌 환상.
그러나 바로 그 환상 덕분에, 우리는 여전히 공연장을 찾고, 무대 위에서 또 한 번의 기적을 기다린다.
* 제가 이번 학기부터 학보사를 병행하게 되어, 학기 중 <무대 밖에서>는 격주마다 올리려고 합니다. 때로는 예기치 않게 더 자주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글의 밀도를 유지하면서, 여러분과의 호흡은 끊기지 않게 이어가고 싶습니다.
항상 제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