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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샘 Nov 16. 2023

눈물

어릴 적 나는 잘 우는 아이였다. 친구랑 다툴 때도 눈물이 나왔고, 부모님께 혼이 날 때도 말보다 눈물이 먼저 흘러나왔다.

김소연 작가의 마음 사전에서 ‘슬픔은 모든 눈물의 속옷과도 같다. 무슨 연유로 울든 간에, 그 가장 안쪽에는 속옷과도 같은 슬픔이 배어 있다.’고 했다. 나도 속옷과도 같은 슬픔이 있었나 보다. 그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교실에서 우는 아이들을 만나면 왠지 안쓰러웠다. 저학년이든, 고학년이든 교실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건 해결하지 못한 어려움으로 슬프다는 건데 이걸 어찌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 어려움이란 친구나 교사가 해결해 주긴 힘들고, 자기 스스로 그 근본을 찾아내는 것 또한 만만하지 않다.   

   

2학년 교실에서 우를 만났다. 우 담임선생님이 아프셔서 하루 동안 대신 그 반을 가르칠 때였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우는 스틱형 약을 흔들며 앞으로 나와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점심 먹고 약 먹어야 해요.”

알겠다고 했는데도 우는  1교시동안 서너 번 앞에 나와 그 말을 반복했다. 2교시에는 자기 목을 만지며 아프다고 또 앞으로 나왔다. 억지로 울음을 참는  보였다.     

 

점심을 먹으러 급식실로 내려갔을 때, 우는 밥을 먹다 말고 훌쩍이며 나에게 왔다. 목이 또 아프다는 거였다. 나는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교실로 올라와서 우가 먹을 수 있게 약 윗부분을 잘라 주었다. 우는 스스로 약(시럽)을 잘 먹었고 그때까지는 괜찮아 보였다.

      

4교시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우가 울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우가 울면서 말하는 통에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신 옆 짝이 “친구들이 자기한테 뭐라고 해서 화가 난 거예요.” 했다. 내가 “누가 그랬는데?” 하자 누구, 누구 이름이 나왔다. 그러자 누구라고 지적당한 여학생이 “아니야, 난 안 그랬다고.” 하면서 훌쩍거렸다. 그러자 우가 "맞다고!" 하면서 어찌나 큰소리로 우는지 귀가 다 멍멍할 정도였다.   

   

우 울음소리에 반 아이들은 슬슬 지쳐갔고 반 분위기도 엉망이 되었다. 똘똘해 보이는 어떤 아이가 “선생님, 우 엄마한테 전화하세요. 우는 엄마한테 전화를 하면 울음을 그쳐요.”라고 했다.

나는 그 아이 말이 제일 놀라웠다. 어떻게 우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울음을 그친다는 거지?  하지만 나는 우 엄마에게 전화하는 대신 준비한 자료로 수업을 시작했다. 이미 수업이 10분 이상 지난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우의 울음소리가 내 목소리보다 컸는데 점점 우의 울음소리가 작아졌다. 반 아이들은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나는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며 수업을 계속했다.     

 

나중에 담임선생님 얘기를 들어보니 우는 그렇게 가끔 울어서 집에 전화하면 어머니가 “울음 그치지 않으면 손바닥 20대야.”라고 소리친다고 했다. 우는 야단치는 엄마가 무서워서 울음을 그치나 보다.     


그날 이후, 나는 우의 울음소리를 금방 알아듣게 되었다.

우가 교문에 들어서면서 울고 있네.’

‘교실에서 또 우는구나.’

나는 그렇게 간간이 학교 여기저기서 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한 번은 복도를 지나가다 급수대 옆 구석에서 혼자 울고 있는 우를 만났다. 작은 몸을 구부리고 앉아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작은 소리로 “우야.”하고 불렀다. 우는 고개를 숙이고 울다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울어?”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냥 가세요. 혼자 울게.” 이 말을 하며 우는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때 우는 교실에서 엉엉 소리 내며 울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소리 내어 울어도 슬픔이 가라앉지 않아 혼자 조용히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나 보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슬픔이는 ‘눈물은 내가 삶에 문제를 낮추고 집착하지 않게 도와준다.’라고 했다. 기쁨, 슬픔, 분노, 까칠함, 소심함은 모두 소중한 나의 감정들이다. 마음이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는 감정 변화는 자연스러운 거다. 슬픔이 있었기에 기쁨도 있고 분노와 까칠함도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어린 시절, 내 눈물에는 우처럼 나를 알아봐 달라는 바람이 있지 않았을까.

‘지금 많이 힘들다고!’

‘말로 할 수 없는 속상한 게 많아.’

‘얼마나 힘들면 이렇게 소리 내며 울겠어.’

하지만 내가 울기만 하면 친구는 더 큰소리를 쳤고 나는 싸움에서 진 아이처럼 보였다. 나를 알아주기는커녕 무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울지 않고 말을 해야 친구와 소통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부모님께도 울음이 의사소통의 방법이 되는 건 영아기 때뿐이고, 울어도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점점 나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걸 배우기 시작했다. 아마 우도 지금 그걸 배우는 과정인 듯하다.  

    

가끔 우는 공부가 끝나고 집에 갈 때 교무실에 들러서 인사를 하고 간다. 내가 빨리 안 보면 “선생님!”하고 부르다가 쳐다보면 씨익 웃는다.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빨리 안 오면 손짓을 하기도 한다. 내가 가까이 가면 작은 소리로 말한다.

“선생님, 저 오늘 교실에서 안 울었어요.”

그러고 보니 우의 울음소리를 들은 날에는 오지 않고, 울지 않은 날에만 교무실에 오는 것 같다. 우도 교실에서 울거나, 눈물을 흘려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우는 중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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