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사람 숨이나 쉴 수 있게 해줘야 할 거 아닙니까?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고요?"
5년 전 장남인 남편은 주말농장 농막에서 심장마비로 소천했다. 남편이 가고 4년 후
너무 예쁘고 싹싹했던 큰 시누는 뇌출혈로 쓰러져 지금까지 의식이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또다시 시동생 마저 심장마비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계속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 앞에 남은 자들은 또 한 번 망연자실,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이 이런 것일까?
'하나님 뜻이 분명 있으실 거야.'
변함없는 신념으로 확고한 나였지만 반복되는 고통 앞에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어떠한 대변도 할 수없었다. 지금 내 앞에서 신의 존재에 대해 따져 묻는 큰 시누이 남편의 복받치는 원망과 분노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기에.
31년 전 스물셋이었던 나는 일곱 살 연상인 남편과 결혼을 했다. 한량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와 달리 다정하고 따뜻했던 남편에게 처음부터 마음이 끌렸다. 그가 내게 주었던 안정감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겪어 본 것이었기에 그와의 결혼에서 나이차이나 문화적 환경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딸이 안동김 씨 장남에게 시집을 가 맏며느리가 된다는 사실은 우리 부모님을 충분히 경악하게 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불안정한 가정환경과 부모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반대를 위한 반대에 목숨이라도 걸 준비가 되어있었다.
얼마 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고 부모님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결혼을 허락하셨다.
시아버님은 육 남매의 막내로 태어나셨다.
제일 큰 형은 치과의사로 일찍이 일본에 귀하해 살고 있었고 둘째 형과 셋째 형은 철도 공무원으로 전국을 돌며 생활해야 했다. 형들이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날 때 막내인 시아버님께
"부모님을 봉양하고 농사짓고 있으면 나중에 공부시켜주마"
약속하고 집안의 모든 짐을 떠맡기게 되었다.
순진한 시아버님은 형들의 사탕발림에 속아 부모님을 봉양하고 일 년에 열 번이나 되는 제사를 모시며 사셨다. 형들이 발령받아 근무지를 옮길 때면 어린 조카들까지 떠맡아 키우기도 하면서 신혼도 없이 평생을 사셨다. 할아버지 또한 장손이셨기에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집으로 모여드는 친척의 수도 어마어마했으니 학창 시절 남편과 형제들은 늘 시끌벅적한 환경에서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평생 자신들의 알콩달콩한 삶도 포기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고 조상신을 모시며 원망 없이 사신 시부모님. 그런 부모님께 그저 순종하며 착하게만 살던 자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