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아이를 낳기 전 아니, 엄밀히 말하면 결혼도 하기 전 남편과 나는 '우리가 아이를 나으면...'이란 가정하에 이야기를 많이 했다. 특히 아이 이름에 관한 이야기. 그도 그럴 것이 안동김 씨 족보 상 우리 아이 대는 항렬이 '구'자로 끝나기 때문이었다. '김 0구' 족보에 올려야 하니 반드시 써야 하는 이름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아버지가 막내이기 때문에 이미 괜찮은 이름은 벌써 다 쓰고 있다는 것이다. 김민구, 김희구, 김덕구... '구'로 끝나는 이름이 흔하지도 않지만 왠지 촌스러운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 자기, 그렇다고 '김축구', 김배구', '김탁구'로 지을 수 없잖아, 우리 이렇게 하면 어떨까?"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우리 이름 가운데 글자로 이름을 지으면 어떨까?"
"우리 이름 가운데 글자로?"
"응, 자기 이름이 '상일'이고, 내 이름이 '은희' 니까 '상은'이 어때? 아들이든 딸이든 다 괜찮은 이름인 거 같은데."
"상은이? 괜찮은걸! 내 이름하고 비슷하게 들리지만 '은상'이나 '축구' '배구' 보다는 훨씬 더!"
우리 둘 사랑의 첫 열매니 첫아이 이름을 '상은'이로 짓자는 의견에 남편은 적극 찬성했다. 첫아이를 나았을 때 장손이라고 시부모님들은 장명소에서 여러 개의 이름을 지어 오셨지만 이미 며느리의 '한 고집'을 눈치채셨는지 우리의 의견을 받아주셨다.
'안동김 씨 가문에서 감히 며느리가 항렬을 깨는 이름을 짓다니!'
큰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했지만 시아버지를 믿고 첫아들 이름은'김상은'으로 족보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 후로 눈치만 보고 있던 친척 형님들도 항렬을 무시하고 '김영빈', '김민석'등 조카들의 이름을 과감히 짓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 대에 안동김 씨 항렬은 파기되었다.
감히 며느리가 의견을 자유롭게 낼 수 있었던 것은 시아버지의 사랑이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란 말은 정답이다.
시댁 사촌 며느리들은 모두 키가 훤칠하다.
남편키도 180cm 정도 되다 보니 160cm이 채 안 되는 나는 더 작아 보였다.
"으흠, 키가 좀 작데이, 그러나 인물이 좋으니 됐데이."
시아버지는 내 외모를 맘에 들어하시며
며느리 '합격'점을 주셨다. 결혼 후 친척 경조사 때는 꼭 우리를 부르셔서 대동하셨다. 그때만 해도 결혼 한지 얼마 안 된 새색시라 집안 대소사에 꼭 한복을 입어야 했다. 한복을 입고 시아버지 팔짱을 끼고 다녔다. 안동 문화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시아버지는 싫은 기색 없이 하회탈처럼 웃으시며 다니셨다. 지금도 가끔 시어머니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참 희안했데이!' 하며 웃으신다.
안동 부사가 익어갈 무렵 시댁에 가면 아버님은 과수원에서 예쁘게 생긴 사과 두 알을 주머니에 넣고 오셔서 며느리 손에 쥐어 주곤 하셨다.
동네 어른들과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나무로 만든 원앙새 한쌍이나 그 밖의 아기자기한 선물을 꼭 사다 주셨다. 평생 농사만 지으신 분이라 가끔 답답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인생을 좀 다르게 살았더라면 멋지고 낭만적인 분이었을 거란 안타까움이 있다.
" 언제 오노?, 조심해서 내려온나."
추석 일주일 전은 시아버지 생신이다. 추석에도 가야 하는데 생신 때문에 그 먼 길을 추석 일주일 전에도 가야 하는 상황이 매번 짜증이 났다. 김포에서 안동 가는 기차를 타려면 청량리역까지 가야 한다. 아이 둘을 데리고 짐을 챙겨 2시간 거리의 청량력에 도착하면 이미 모든 기운은 탈진해 버린다. 지금처럼 지하철 역마다 에스컬레이터도 없으니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몸살이 날 지경이다. 이런 고생을 모르시는 것도 아닌데 한 번도
"힘든데 내려오지 말고 애비랑 명절 때 같이 온나."
라고 말씀을 안 하시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세월이 다 지나고 시아버지도 하늘나라에 간지 십여 년이 됐다. 이제는 아이들도 다 커서 훨훨 가볍게 갈 수 있는데 그곳엔 반겨줄이가 없다. 좀 더 기쁜 맘으로 가 뵈었다면 이제와 서글픈 그리움이 없었을까? 오늘따라 두 손에 꼭 쥐어주시던 안동사과가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