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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햇살 Jul 12. 2024

죽은 자를 위해

산자를 바치다

'안동(安東)'은 이름 대로  모든 면에서 평온하다.

 특히 우리  시댁은  환경뿐 아니라 사람의 성품까지 모난 곳 없이 편하다.

명절에 가끔 가족들이 고스톱을 친다. 친정은  형제라 해도 승부엔 절대 양보가 없다. "따고 배짱부리면 손 잘린다!" 행여 화토판에서 돈을 따고 슬그머니 빠지려 꾀를 냈다가는 곧 죽음이다~ㅎ   그러니 늘 재미있고 스릴 넘친다.

상대의 패를 예측하고 판을 읽어야 하는 동양화 보드게임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반대로 시댁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 자, 향남이 니 해라." 오빠는 막내 여동생이 판돈을 따도록 패를 던져준다.  형이, 동생이, 언니가 돈을 따가길 바라니 무슨 게임이 되겠는가!

재미도 없고 스릴도 없으니 판을 폈다 곧바로 접기가 일쑤다.



하지만 이렇게 순하디 순한 시댁식구들도 절대 양보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제사.

"제사는 절대로 안 물려주고 내 대에서 끝낸다"

말씀하셨던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지만 조상이라면 껌벅 죽는 시동생과 시어머니에 의해 제사는 굳건히 이어졌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크리스천 맏며느리인 나도 제사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나마  시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는 제사 음식 하는 걸 돕는 수준이었지만 돌아가시고 나니 당연히 장남이 지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들어왔다.

 언젠가부터

'시댁 식구들을 전도하려면 자주 만나야 하는데, 제사를 우리 집에서 지낸다면 더 친밀해지고 전도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에서 제사를 할게요."

그 당시 나는  '전도' 방법에만 집중해 앞뒤 생각 없이  우리 집에서 제사를 하겠다고 선포를 했다.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낸 지 3년째 되던  어느 날

갑자기 세차게 몰아친 비로  둘째 아이방 베란다가 물바다가 되었다. 제사 용품과 조상들 사진을 그곳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베란다 문이 열려 있어 비가 들이치는 바람에 제기와 조상들 사진이  다 젖고 말았다.

" 민혁이 얼른 저것들 날라서 거실로 꺼내 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둘째는 제기와 사진이 든 상자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어! 엄마!!!" 물건을 나르던 아이는 갑자기 기절하듯 소리치며 뒤로 넘어졌고 증조, 고조할아버지들의 흑백 사진은 공포스럽게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비가 와서 어두컴컴한 날씨에 갓을 쓴 조상의 흑백 사진을 보고  180cm 거구의 아이가 바닥에 자빠져 공포에 떨고 있지 않은가!

제사에 지방을 써야 하는데  만약 지방을 쓰지 못할 경우 영정사진 처럼 된 액자를 제사상에 올려놓고 지내야 하기 때문에 사진들을 상자에 넣어 논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가족의 화합 때문에 승낙했던 제사였는데 하마터면 아이를 잡을 뻔한 것이다.



아버님 기제사가 되었다. 평일인데도 제사에 열정인 시댁 식구들은 대구와 안동에서 모두 올라왔다. 맞벌이라 낮에 시간이 없던 나는 며칠을 걸려 장보고 음식을 만들어 제사상을 준비했다.

"아이고, 아버지여, 이거 한번 잡숴 보이소."

"아버지, 향남이라예, 어케되든 많이 드이소."

큰 시누 작은 시누는

'아버지 들어오시게 현관물을 열어놔라...'등등

유난을 떨더니 젓가락을 이리저리 옮겨 놓으며 마치 아버지가 그 상에 앉아 있듯이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우리 가족은 그런 모습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문화라 생각하고 제사의 진행을 도왔다.



제사가 끝나고 다 모여 앉은자리에서 남편은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우리 집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가족들 이렇게라도 만나면 좋겠다 싶어 제사를 지내기로 했어. 근데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섭섭하겠지만 제사를 기독교 식으로 바꿨으면 한다. 우리 애들 믿음 좋은데 둘 중 누구 하나 목사 될 줄 아냐!"

순간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싸'해졌다.

사전에 내게 의논 한마디 없었던 터라 당황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을 어쩌지?'

머릿속이 하얘지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고

뛰는 심장처럼 벽시계의 초침소리만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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