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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햇살 Jul 13. 2024

죽은 자를 위해(2)

산자를 바치다

결혼해서 보니 시댁 제사는 일 년에 열 번. 

시제까지 하면 열한 번.

안동 제사에는  고등어. 상어, 소고기등을 잘라 산적을 만들어 올린다. 산적을 만들려면 뼈가 있는 생선을 일일이 칼로 잘라야 하는데 오랜 세월 하다 보면 손가락 관절이나 손목 등에 무리가 간다. 평생 그 일을 해오신 시어머니의 손 마디마디는 이미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최상품 과일이나 문어 등을 써야 하니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산자의 수고를 제하고서라도  시부모님의 삶이 산자를 위한 건지 죽은 자를 위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제사를 안 지내는 기독교는 우리나라 유교사상에 길들여진 어른들, 특히 안동 사람들에겐 비판의 대상이다.

'지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보는 아주 상놈들'인 것이다. 이런 오해 속에 기독교, 엄밀히 말해 제대로 된  크리스천들의 제사의식은 어떤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기독교식 제사는 가족들이 모여 돌아가신 분을 추억하며 기린다. 서로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비록 비싼 돈을 들여 잘 먹지도 않는 전통제사 음식을 바리바리 준비해  높은 단을 쌓지 않지만 산자들 중심으로  추모의 의미는 충분하다.

사람이 죽으면 이 땅에서 육신의 삶이 완전히 끝나는  것이기에 죽은 자들을 우상시하지 않는다.

그러니 집안이 잘못돼도 조상 탓을 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을 위해  살아있는 자들이 제사로 고통받고 갈등하는 것은  참된 추모의 의미를 오히려 퇴색시키는 것이다.



우리 가문의 이단아 '교회 할배'는 우리 시아버지 보다 어리지만 항렬이  높아  시아버지의 아재,우리에겐 할배로 불린다. 항렬이 높으니 일찍이  예수님을 믿고 장로가 되어도 누구 하나 토를 달 수 없었다.  설명절이 되면 교회할배 댁에 세배를 간다. 그곳에 가면 제사 음식이 아닌 맛있는 다과를 먹고 평소 여행 다니며 찍었던 사진첩을 보거나 책 이야기, 일상이야기를 한다. 그 집 며느리들은 기름냄새에  쪄들어 있지도 않고 화사한 얼굴빛에 여유가 가득하다. 교회할배는 중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교직을 은퇴하고  부부가 세계를 여행하며 살고 있다.

 



장남인 남편이 제안한 '기독교식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집안 제사는 딸만 둘인 시동생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 어느 날 남편은 심장마비로 하늘나라에 갔다.  가슴에 큰아들을 묻은 팔순노모는 가문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제사를 놓지 못했고 산자의 삶은 때마다 제사상 위의 제물로 올려지고 있었다.


"누구 하나 목사 될 줄 아나?"

가족들 앞에서 선포된 마지막 말이 남편의 유언처럼 느껴졌다. 평소 교회 일에 열심인 나와 달리 남편은 주일 예배에만 참석했다. 누가 봐도 내가 봐도 나는 남편보다 믿음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남편의 믿음을  오해한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만 아신다.'

기독교식 제사를 선포한 남편의 마지막 말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담대함과 간절한 소망을 말해주고 있었다.

"상은아, 엄마는 네가 목사님 되면 좋겠다. 너는 찬양할 때 가장 행복해 보여."

아빠가 하늘나라 간 후 뒷일을 수습하고 동생과 엄마를 돌보며 진로를  고민하던 아들에게 나는 남편의 유언과 같은 말을 수시로 했다.

"엄마, 나는 소명받은 것도 없고 절대 목사님은 되지 않을 거야."

큰아이는 내가 '목사'의 '목' 글자만 꺼내도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 나는 기업에 취업해서 여의도나 강남에 살면서 도시의 향기를 마음껏 누리겠어."

이렇게  말하던 큰아들은 말한 대로 기업에 취업해 고액의 연봉을 보장받았다.

그렇게 남편과 나의 믿음의 소원은 점점 멀어져 갔고, 시댁의 제사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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