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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햇살 Jul 30. 2024

하나님, 이제 지쳤어요!

끈을 놓아야 할 때

"아이고, 아이고~ 이제 모내기는 어이하노!!"

시동생 영정 사진 앞의 노모의 한마디,

순간  어이가 없다 못해 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어머니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그러면 그렇지, 평생 자신 마음 편하자고, 친척들에게 본인 체면 차리자고 생때같은 자식들 다 앞세웠지!'

 남편의 죽음, 큰 시누의 상황, 이번엔 시동생의 죽음까지...

누구의 책임인가? 누구의 책임인가?

누구의 책임인가!!!




"형수요, 설날 미리 내려오지 말고 대구에서 제사 지내고 우리도 어차피 안동 넘어갈 거니까 형수도 설날 당일 안동으로 오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손님 맞이 하려면 형수가 집에 있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남편이 하늘나라로 간 후 시동생의 배려로 구정

당일 안동에 가서 명절을 보내고 왔었다. 그런데

작년 추석 전 큰 시누가 쓰러지고 이번 설에는 대구에서 다 모이게 되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남은 형제들이 모여 예전처럼 웃고 떠들고 할 상황도

아니기에 설전 날 큰아이와 함께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에 도착해 큰 시누 병문안을 하고 큰 고모부와 함께 어머님이 있는 시동생 집으로 가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시어머니가 대구에 오후 늦게나 도착한다는 것이다.

"장모님, 아직도 안 오셨어요?"

"네, 전화해 보니 안동에서 제사음식 준비하고 있다네요."

"제사요? 어? 장모님 올해는 제사 안 한다 켔는데! 집에 아픈 사람 있다고."

"그래요? 근데 뭐 지금 전 부치고 있다고 하시네요."

큰 고무부는  다시 제사를 지낸다는 소식에 의아

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럼 우리 이사했는데 우리 집에 가입시더,  가서 차라도 한잔하고 가입시더."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를 앞두고  갑자기 쓰러진 큰 시누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축하해 주는 마음으로 들르기로 하였다.




안동으로 어머니를 모시러 간 시동생이 어머니와 함께 대구에 도착했다.  

그동안 엄마 밥이 그리웠을 조카들을 위해 집에서 갈비와 몇 가지 반찬을 준비해 내려갔다.

큰 고모부와 조카들은 고기도 한 번 못 먹어본 사람들처럼 아주 맛있게 먹었다.

"어머니, 대구 오신 김에 큰아가씨 만나고 가셔야죠."

"안가, 내가 가면 뭐 하! 가슴만 아프지!"

"그래도 어머니 많이 보고 싶을 텐데..."

"장모님, 선남이가 뇌기능은 거의 회복되었는데 지 처지를 알아버렸답니다, 그래서 절망상태라 안 깨어난다고 카네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가셔서 선남이 귀에 대고 '선남아, 엄마 왔다,  얼른 일어나.'라고 한마디만

해주세요. 엄마라면 끔찍한 딸이니까 어머니 목소리 들으면 금방 깨어날 수도 있잖아요."

"일없다, 다음에 오던지..."

매몰차리만치 단호한 시어머니 반응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 아주버님이랑 형님은 참 좋아 보여요. 나는 지원이 아빠랑 대화가 안 통해요, 꼭 벽이랑 사는 거 같아요."

"동서, 겉으론 행복해 보여도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아."

"그래도 형님이랑 아주버님은 신앙이 같으니까 말은 잘 통하죠, 우리 지원이 아빠는  쉬는 날 가족끼리 가까운 공원에도 가본 적이 없어요."

"어머, 그래? 그럼 쉬는 날 뭐 하고..."

"안동밖에 몰라요, 주말마다 안동 가서 일하고 오니 우리는 가족끼리 변변한 추억도 없어요."

"아니, 삼촌은 왜 그러냐? 이제 애들도 커가는데 몇 년 안 있으면 같이 가자고 해도 안 가요."

"그러게요, 지원이 아빠가 안 가면  안동에서  불이 나도록 전화를 하시니 안 갈 수도 없죠."

"많이 속상하겠다, 우리도 어머니께  농사 좀 줄이시라고 얘기는 하는데 고집이 좀 세셔야지."

"가까이 사는 게 죄지요."

마음이 채워지지 않던 동서는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 시동생과 이혼하게 되었다.




그런 아들이 마음이 어떤지 헤아리시기나 하는지 어머니는 변함없이 대농을 하시며 작은 아들을

오라 가 하셨다.

큰아들인 내 남편이 갑자기 소천했을 때, 큰 시누가 쓰러졌을 때, 시동생이 갑자기 소천했을 때, 우리는 행여나 어머니가 충격으로 쓰러지지 않을 노심초사했었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시어머니는

때마다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내가 시어머니와

같은 입장이라면  어떨까? 생각하니 아들의

영정사진 앞에서 '모내기'를 걱정하시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머니! 모내기가 그렇게 중요하나요? 춘일이 평생 논일에 밭일에 문중산 벌초까지 고생만 하다 갔는데..'

차마 내뱉지 못한 말들이 분노와 섞여  고통스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고,  그저 우리 애들 잘 돌봐주시고..."

설 제사장 앞에서 웅얼거리는 시어머니의 목소리, 그것을 지켜보는  크리스천며느리와 목회자가 되려는 장손.

결혼한 그날부터 31년간 시댁식구들을 위해 기도해 왔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미신과 우상숭배에 젖어있는 시댁식구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안동김 씨 맏며느리가 되어 최선을 다해 시댁을 섬겼다.

크리스천으로 시댁식구들 구원을 위해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3년 동안 제사를 모셨다. 그렇게 해서라도 시댁 식구들과 가까워지고 하나님을 전하고 싶었다.

남편의 유언 같은 마지막 말

 "애들 모두 믿은 좋은데 누구 하나 목사 될 줄 아냐? 이제부터 우리는 기독교 식으로 제사하겠다." 장남의 확고한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장남이 죽은 후에도 제사는 계속되었다.




"이제 부처고 귀신이고 제사고 다 필요 없다. 우리는 착하게 산거 밖에 없는데... 이젠 다 필요 없다!"

"신이 있기는 있는 겁니까!..."

막내 시누와 큰 고모부의 원망.

"아이고, 모내기는 어이노!!" 시어머니의 이해할 수 없는 생각들.

먼저 간 내 남편, 누워있는 큰 시누, 그리고 고생만 하다간 효자 아들 시동생까지...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하나님! 31년입니다. 변하지 않는 우리 시어머니와 시댁식구들 이제 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지옥에 가거나 평생 하나님을 믿는 기쁨을 모르고 살거나 더 이상 저도 모르겠어요.'

시어머니는 장례가 끝나면 절뚝거리면서  제사음식을 만들고 밭에 나가 하루종일 밭일을 할 것이다. 변함없는 고집으로 묵묵히 그리고 맘 편히 살 것이다.

'하나님, 이제 저는 시댁과 인연의  끈을 놓겠습니다. 저도 많이 지쳤어요!'

'도련님, 미안해요. 이젠 저도 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영정 사진 앞에서 나는 이별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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