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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인 Z Dec 29. 2020

혼자가 편하다는 착각

사실은 거절당하는 게 극도로 무섭다.

20대에는 많은 여행을 혼자 다녔다. 


낯선 곳에서 늘 외로웠지만, 먼저 다가갈 용기를 못 냈다. 

혼자 먹는 밥이 맛있을 리가 없었지만, 내가 세운 일정이 틀어지는 게 싫었다. 

계획의 변경은 예상치 못한 비용의 증가와도 같으니까. 

딱 주머니 사정만큼이 내 마음의 크기였다. 


여자 혼자 용기 있다. 멋있다.  

그땐 그런 말들에 나도 내가 멋있는 줄 알았지만, 

내 일기장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 


나는 비싼 비용을 들여서 나의 용기 없음과 외로움만 뼈저리게 느끼다 돌아왔지만

부러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가 내 안에 모순들을 인정하지 않고 완벽함에 빠져있을 때,

나는 내가 한 말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다. 

만나기로 약속하면 무조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게 힘들거나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내내 마음에 걸려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노력했다. 


그 사람이 그만큼 소중한 경우도 있었지만, 

내면 깊이 들여다보면 약속도 잘 지키는 완벽한 내 모습이 우선이었다. 

그 모습을 유지하는 게 무척 버겁고 힘든 만큼, 

누군가 자신의 말과 다른 행동을 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불 같이 화를 냈다.


학창 시절의 내 친구들은 나의 이런 태도 때문에 불편해했고,

가장 친했던 친구는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 

아니 사실은 여러 명을 울리면서 독재자처럼 굴었다. 


그땐 내 태도의 잘못됨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지금 잠시 불편하지만 나로 인해서 친구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여겼으니

얼마나 불우한 시절이었는지.


주변인들이 나를 어려워하는 걸 오히려 안심했던 것도 같다. 

힘들지만 내가 잘하고 있구나, 내가 애쓰는 걸 그들은 모르는구나. 
그렇다면 됐다. 최소한 무시를 당하진 않을 테니까 나는 안전하다. 


인간관계에서 이런 일방적인 관계가 형성이 되면 결코 오래갈 수 없다.

나는 많은 수의 친구를 잃어갔다. 


친구가 별로 없고 내 시간을 잘 조절한다는 착각에 힘입어 

손절의 아이콘이 됨을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난 불안했다. 

누군가 내 내면의 커다란 구멍을 알아채고 떠나버릴까 봐 늘 전전긍긍했다.  

그런 내가 너무 피곤해서 만나는 사람 수를 더 줄여갔다. 


간혹 그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한 발을 들여놓은 사람에게 과하게 감동한다.

이제 잘 지내면 되는 일만 남았는데, 

극도록 거절이 두려운 나머지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다. 

연락을 먼저 잘 안 하는 성격이라고 했지만 그런 성격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한 번씩 다가오는 사람들을 과하게 반겼고, 그런 들뜬 내 모습이 창피해 

다시 시크함으로 나를 포장한다. 


내 허영과 자기기만이 나를 돌아보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았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만큼 난 헛발질을 해댔고,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을 외면했다.

가장 소중하다고 말로만 외쳤던 나를 돌보지 않았다. 


내 말의 모순만큼 내 속의 구멍이 점점 커졌다. 

그 허무를 달래 길이 없어 별 소득 없는 것들로 시간을 채웠다. 


자리를 잡아가는 친구들을 떠나보냈고,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만 만나다 그 마저도 지겨워져 혼자서 보내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 작은 공간 속에서는 나는 안전했다. 

내 못남을 확인하지 않아도 됐고, 괜찮은 척 억지로 꾸며내지 않아도 되었다. 


사랑받으면서도 사랑받는지 몰랐다. 

늘 불안해서 확인받고, 결국은 지쳐 떨어져 나가게 만들었다.

매번 차였다는 나의 말의 이면엔 이러한 과정들이 있었다. 

그럼, 언제 그랬냐는 듯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척한다. 

애초에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 괜찮다. 

내 구멍은 안 보였으니, 이만하면 들키지 않고 잘했다 생각한다.

그렇게 또다시 파고 파고 들어가 더 깊은 구멍을 만들고, 

더 두꺼운 문을 걸어 잠근다. 

나는 안전하고,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다.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미건조한 날들을 이어간다. 


사실은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괜찮지 않았다. 

매일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고, 운동을 하며 

자존감이 높아 보이는 삶을 사는 척 하지만

나는 나의 자존감이 바닥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누구보다 자존감이라는 단어에 매달리고, 그걸 높이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나는 많은 부분에서 재 사회화가 필요하고, 

거절의 상황에 노출시켜 마음 근육을 단련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런 상황에 아무런 면역력이 없다. 


나의 이런 태도에도 내 곁에서 나를 생각해주는 이들은 한 인간을 구한 거다.

그러니 이제 연락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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