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교회 첫 예배
거리는 평소와 다르게 한갓졌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이었다. K 리쿼 맞은편 참나무 밑 그늘에선 꾀죄죄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유천이 시계를 보았다. 바늘이 11시를 가리켰다. 유천이 갈색 점퍼 지퍼를 올리며 사람들 앞으로 다소곳이 걸어 나왔다. 모두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호기심과 기대 어린 눈초리로 유천을 바라보았다.
"야생교회 첫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천이 차분하게 말했다.
환호가 터졌다. 더러는 "야호 야호" 소리치며 카우보이가 채찍을 휘두르듯 한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고, 더러는 박수를 쳤고, 더러는 양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을 "휙휙" 불었다.
어딜 가든 쓰레기 보듯 하는 시선 때문에 생의 의욕을 잃곤 하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당당한 인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흥분을 절제하지 못했다. 들끓던 소란이 가라앉을 때였다. 흥수가 오른손을 번쩍 쳐들고 말했다.
"예배가 밥도 먹여줘요?"
"저건 먹는 것밖에 몰라"하는 비아냥과 함께 폭소가 터졌다. 이치에도 경우에도 맞지 않는 어떤 말이나 행동 모두 웃음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분위기였다. 유천은 확신에 차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이지요. 밥만 먹여 주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사람을 부러움의 대상으로, 불행한 사람을 달콤한 꿀을 맛본 사람으로, 악한 사람을 존경받는 사람으로 만들며 깨진 관계를 찰떡궁합으로 바꾸기도 하지요."
자신들이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나 된 듯 모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대섭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도하고 시작하지요."
"그것은 각자 알아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유천이 눈짓으로 대섭에게 양해를 구하며 답했다.
"먼저 기도하고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대섭이 따지듯 말했다.
"하나님이 순서나 형식을 따지는 꼰대는 아니니까요." 유천이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듯 모두 긴장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함을 느꼈다.
"기도는 때와 장소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요. 무작정 전통을 따르다 보면 듣기에 그럴듯한 기도는 할 수 있지만 오히려 헛된 것이 될 수 있지요. " 불안해하는 낌새를 감지하고 유천이 더하여 설명했다.
아리송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흥수가 물었다.
"헛된 기도도 있어요?"
"그럼요. 생명을 살리는 능력 있는 기도도 있지만, 허공에만 떠도는 기도도, 망하게 하는 기도도 있어요." 유천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떤 기도가 허공에 떠돌고 망하게 하는 기도예요?" 흥수가 얼굴을 찡그리고 물었다.
"노예와 거지 근성으로 달라기만 하는 기도도 그렇고, 욕심에 끌려 바락바락 떼쓰는 기도도 그렇고, 혀에 기름 바른 듯 반지르르하게 하는 기도도 그렇고...." 유천이 답했다.
"그러면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흥수가 물었다.
"그것은 예배가 다 끝날 즈음이면 저절로 알게 될 거예요." 유천이 말했다.
흥수가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잠잠이 있었다.
"오늘 설교는 전도사님이 하는 거지요?" 대섭이 물었다.
"아니요. 덕천이 하기로 했어요." 유천이 답했다.
"아니, 덕천이요?"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대섭이 주위를 둘러봤다. 머릿속이 진공상태가 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모두 할 말을 잃고 잠잠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덕천이 어떻게, 이것은 분명 금단의 열매를 따 먹는 것이야.' 대섭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알아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하지만 누구든 남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 안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어요. '저래서 실패했구나, 나도 그 상황이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하나님이 살아 있는데 어떻게 저런 일이 생기지?, 바보 멍청이 등등. 그러며 말하는 이의 심정에 공감하기도, '왜 그렇게 했어?' 물어보고 간섭하고 싶은 마음을 느끼기도 하지요. 뜨거운 사랑이나 화가 끓어오를 때도 물론 있을 것이고...." 유천이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대섭이 대꾸했다.
"그 당연한 것들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있어요. 바다에 널려진 수 없이 많은 조개들 가운데 진주를 품은 진주조개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 들 속에서 진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콕 집어낼 수 있는 실력이 사랑과 진리로 아름답게 조화된 성숙한 신앙인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게 되는 거예요." 유천이 말했다.
흥수가 물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은 진리와 사랑에 속한 것이겠네요."
"물론이지요. 그러나 진리는 입체적인 것이라 누가 어디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모양을 하고 있어요. 그런 진리에 사랑이 더해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서로 다투다 원수가 되는 거예요." 유천이 말했다.
흥수가 항의하듯 말했다.
"그런데 실패해서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요? 최소한 본받을 만한 것이 있는 사람이거나 부러운 성공사례가 있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귀를 쫑긋하게 되는 것 아니에요?"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나 똑같이 삶의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어요. 그런데 교회 전통이 신비함 속에서, 성직자의 입이나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금단의 열매를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믿도록 강요했어요. 그 결과가 교회가 쇠퇴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신비스러운 것 속에는 허구가 많고, 불완전한 인간인 성직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 역시 모순이 많고, 성경을 통한 이야기 속에도 오해한 해석이 많기 때문이지요. 차리리 민초들의 이야기 속에 진리와 사랑을 담고 있는 경우가 더 많지 않아요? 사실 확인이 덜되고 감정에 치우친 거친 이야기들이 많아 권위가 없기는 하지만... 유천이 쓴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흥수가 두 손바닥을 펴 하늘을 향하게 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과연 우리가 덕천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듣다 보면 알게 될 거예요. 이야기를 들으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유천이 말했다.
수염 긴 노인이 "덕천을 박수로 맞읍시다"라며 덕천을 향해 손짓했다. 덕천이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왔다. 더러는 손뼉 치고, 더러는 휘파람 불고, 더러는 "우-우"하며 환호했다.
"여러분들 모두가 잘 아시다시피 저는 오물 냄새나는 하수구에 떨어져 살아가는 낙오자예요. 그래도 내 인생살이를 이야기하다 보면 그 가운데서 귀한 진주나 아름다운 연꽃 같은 진리나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해서 여러분 앞에 섰어요. 사실 어리석은 행동으로 지은 죄 때문에 벌 받은 일만 드러날 것 같은데..."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운이 없었을 뿐이야, 죄짓지 않고 사는 놈이 세상에 어디에 있어!" 길게 수염 기른 노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야기하는 동안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것밖에 없거든요." 덕천이 말했다.
참나무 그늘 밑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경계심, 질투, 시기 따위도 따뜻한 햇빛 아래서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저는 65년 전, 앨라배마의 '건터스빌'이라는 마을에서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리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모,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어요."
"아버지가 데릴사위였구먼." 수염 긴 노인이 말했다.
"네, 맞아요. 그런데 다섯 식구 모두가 나만 사랑했어요." 덕천이 지그시 눈을 감고 천진난만한 어린이 얼굴이 되어 파란 하늘을 보고 싱긋 웃었다.
"안채와 행랑채 사이에 펌프질로 물을 긷는 우물이 있었어요. 그 옆에 커다란 살구나무 한그루가 있었고. 3월 중순이 되면 성질 급한 연분홍 살구꽃이 여기저기 피기 시작했어요. 하필 그때면 꼭 꽃샘추위가 찾아왔어요. 난 꽃잎이 얼어 죽지 않을까 잠을 설쳤죠. 이튿날 아침엔 스쿨버스 시간을 맞추느라 허둥대곤 했어요. 물론 꽃 걱정은 새까맣게 잊어버렸죠. 그런데 교실에서 수업할 때 꽃 생각이 나는 거예요. 선생님에게 '정신을 어디에다 놓고 있는 거야'라는 꾸중을 듣고야 깨어나 선생님께 집중을 했어요. 하지만 '꽃들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궁금은 사라지지가 않았어요. 학교가 파하자마자 서둘러 집에 돌아왔지요. 그리고 살구나무 앞으로 갔어요. 신기하게도 지난밤과 똑같은 상태로 있더라고요. '피었던 꽃은 얼어 죽고, 다음으로 성질 급한 것들이 새롭게 핀 것일까? 얼어 죽지 않고 그대로 버틴 것일까?' 지금도 그 궁금증은 풀리지 않고 있어요."
"꽃잎은 어지간한 추위도 견딜 힘이 있는 거라고." 수염 긴 노인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얼어 죽을 때도 있어요. 그래서 과일 농사를 망치기도 하는데..." 대섭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모두가 노인과 대섭을 번갈아 보다 다시 덕천에게로 눈길을 모았다.
"며칠이 지나면 꽃들이 활짝 피어 집 전체가 꽃천국이 되어요. 동네의 복숭아꽃, 벚꽃, 이름 모를 야생화들까지 덩달아 피어요." 덕천이 평화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수많은 벌들이 윙윙거리며 날아와 예쁜 꽃 속을 들락거려요. 꽃 속에서 노란 가루를 뒤집어쓰고 힘겹게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것을 보고 또 궁금해졌어요. '꿀을 너무 많이 먹어서일까? 다리와 온몸에 묻은 꽃 수술 가루가 너무 무거운 것일까?' 또 며칠이 지나면 꽃잎들이 눈처럼 하늘하늘 하늘을 날다 지붕, 봉당, 앞마당 뒷마당을 하얗게 덮어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어요. 이른 아침, 밤을 보낸 나무에게 가보면 꽃잎이 사라진 자리에 피 흘린 것 같은 자주색 꽃받침이 벌거벗은 암수술과 꽃밥 수술을 애처롭게 떠받치고 있어요. 그 밤을 또 보내고 아침에 가 보면 자주색 받침 위에 암수술과 꽃밥 수술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뽀얀 솜털이 송송 난 연두색 아기 살구가 태어나 있어요. 얼마나 예쁘고 귀여웠는지 몰라요." 덕천은 천국에 있는 듯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들 자신의 옛 고향으로 돌아간 듯 얼굴이 평화로웠다.
"태어난 아기 살구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요. 그런데 얄미운 것이 있어요. 크는 것을 보여주지를 않아요. 성장하는 것을 보고 싶어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어도 그때는 절대로 자라지 않아요. 죽은 듯이 가만히 있어요. 아무도 보지 않는 밤이 되면 그때야 자라요. 아침에 보면 꼭 커져 있어요. 그래도 밉지를 않았어요. 오히려 사랑스러운 거 있지요. 손에 꼭 쥐고 다니고 싶었어요. 또 며칠이 지나면 호박씨만 한 살구가 앵두만 해지고, 또 며칠 지나면 방울토마토만 해지고, 또 며칠 지나면 엄지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을 합친 것만큼 커져요. 며칠이 또 지나면 노란색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을 해요. 얼마 후에는 너도나도 노랗고 예쁘고 말랑말랑하게 익어요. 그러면 난 하루에도 몇 번씩 다람쥐처럼 살구나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거예요. 예쁘고 달콤한 향기가 진동하는 것부터 따 먹는 거예요. 또 며칠이 지나면 너무 익어 땅으로 떨어지는 놈, 나무에 달려 있는 놈, 온 집안이 살구천지가 되어 버려요. 꿀벌들이 물러간 자리에 동네 꼬마 친구들, 어른들이 모두 모여 따먹곤 했어요. 며칠 후 살구나무에 기어 올라가 높은 가지에 달려 있는 살구를 가지를 흔들어 떨어뜨려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그런 광경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어요. 살구나무 심은 것이 일생에서 제일 잘 한 일인 것처럼. 난 사랑의 눈길을 느끼고 잘 익어서 통통하고 살찐 살구를 따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 드리곤 했어요."
참나무 그늘 밑에선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난 꿈이 없었어요. 천국에 있는데 무슨 꿈이 더 필요했겠어요. 동네 어른들이 나를 두고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이야기들을 하는 거예요.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거든요. 어른들 만나면 인사도 잘하고. 내가 생각해도 그들의 말이 맞는 것 같았어요. 여기 좀 봐요." 덕천이 상체를 숙여 자신의 정수리를 오른손으로 가리켰다.
"뾰족하지요? 남들과 다르잖아요? 난 그것이 범상치 않은 증거라고 믿었어요." 참나무 그늘에 앉아 이야기를 듣던 모두가 덕천의 머리통을 보려고 일어났다. 하지만 덥수룩한 머리털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래도 그대로 믿었다. 그리고 실없이 자기 머리통을 만져보았다.
"군대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할 때면 난 곧바로 쓰러지곤 했어요. 뾰족한 머리통 때문에 오래 버틸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더 두들겨 맞곤 했어요. 그래도 억울하지 않았아요.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서 그런데 뭐' 하고 오히려 뿌듯했어요. 할머니는 나를 위해 매일 새벽마다 기도를 했지요. 동네에서 나만 '어번'으로 가 대학을 다녔지요. 그때 난 범상치 않은 내 운명이 실현될 날만 남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어요."
햇빛에 비친 이슬방울 같은 반짝이는 눈동자가 전부 덕천을 향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지요. 친구들은 풋볼 게임을 본 후 앨라배마 팀이 이기면 좋아서, 지면 화나서, 밤새도록 술 마시고 이민자, 동성애, 에너지, 기후문제를 해결이나 할 듯이 떠벌리곤 했지요. 난 그에 휩쓸리지 않고 학교 청소를 했어요. 학비를 벌어야 했거든요. 범상치 않은 내가 범상치 않은 실재가 되면 사회에서 그들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어요." 덕천이 말하고 쓴웃음을 웃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려는데 회사에서 임금을 너무 적게 주는 거예요. 특별한 기술이 없으니.... 그래도 불안하지는 않았어요. 범상치 않은 운명인 데다 할머니는 날 위해 매일 기도를 하셨거든요."
"세상을 너무 깔보았구먼" 하고 노인이 말했다.
"사실 세상을 깔본 것은 아니고 세상에 무지했던 거예요. '싼 임금이라도 시작을 해야 해. 그리고 한 단계 두 단계 올라가는 거야. 넌 믿지 말아야 할 것에 너무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아. 게으름을 핑계대려는 거 아니야? 엉뚱한 것에 의지하면서...'라는 소리들이 내면 밑바닥에서 말하곤 했었는데 말이에요. 그러나 난 모두 무시했어요."
덕천이 한숨을 크게 쉬고 이야기를 천천히 이야기를 이었다.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유명한 작가가 되리라는 꿈을 품고서. 하지만 고속도로 공사판에 가서 막노동을 하기도, 시커먼 탄광에 들어가 탄을 캐기도 했어요."
그때 흥수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글을 쓴다고 하면서 공사판과 탄광은 왜 갔어요?"
"공사판과 탄광의 생활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공사판과 탄광에 관한 글을 쓰려고 한 거예요?"
"아니요."
"남들은 먹고살려고 탄광에서 일을 하는데 뭐 하려고 거 길 갔어요? 그곳에 관한 글을 쓸 것도 아니면서..." 흥수가 붉어진 얼굴로 타박하듯 말했다.
"밑바닥의 삶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요. 낭만도 느꼈거든요." 하지만 생존을 위해 갱 안에서 일했던 광부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글을 쓴다고 자랑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치장하듯 이력서에 한 줄 넣으려고 그랬겠지." 흥수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시건방을 떤 거지 뭐." 수염 기른 노인이 맞장구쳤다.
덕천이 빨개진 얼굴로 잠잠히 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곤 말했다.
"참으로 부끄럽네요. 그때 내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는데 무시를 했어요" 하고 고개를 숙였다.
대섭이 물었다.
"무슨 글을 썼어요?"
"'살구나무'라는 글이었어요. 천국 같은 나의 어린 시절에 뿌리를 둔 이야기였어요. 문예지에 응모를 했어요. 하지만 15번을 떨어졌어요. 수정하고 또 수정을 해서 다음 해에 출품하고 또 했어요. 하지만 매번 실패의 쓴 맛을 보고 또 보았어요. 내 글을 본 친구들은 글이 난해하다고 했어요. 천국 같은 나의 뿌리 이야기를 정신병자 이야기로 바꾸었어요. 그래도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글을 읽은 친구들이 그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친척들, 친구들은 기대의 끊을 놓지를 않았어요. 범상치 않은 운명이 그대로 될 것이라고 믿었던 거지요. 그러며 나의 필요를 채워주며 응원을 했어요. 커피도 사주고 술도 잘 사주고 용돈 주면서...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비루해졌어요.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텐트 하나만 있으면 살 수 있는 따뜻한 캘리포니아로 이사 온 거예요."
흥수가 끼어들었다.
"지식과 글재주를 너무 많이 드러내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그래서 글이 어려워지는데도 오히려 정신병자로 주인공을 둔갑시킨 것 아니에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잘난 것을 드러내고,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잘 팔리는 책을 만들려고 속임수를 동원한 것 아니에요?"
덕천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눈에 눈물이 맺히다 양볼로 주르륵 흘렀다. 참나무 그늘 밑에 있는 이들 모두가 머리를 숙이고 애꿎게 옆에 핀 민들레꽃을 따고, 잔디를 손으로 쥐어뜯고 있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덕천이 이야기를 이었다.
"사실 내 안에서 '너는 헛것을 믿고 의지하고 있는 거야, 아니, 거짓 속에 있는 거야' 하는 소리가 있었는데 무시했어요. 하나님의 음성이라 여겼으면 들었을 텐데.... 그러는 가운데 부모님들이 다 돌아가시고, 재산도 다 사라져 버리고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기고 나만 홀로 이렇게 남은 거예요."
흥수가 이야기했다.
"덕천 씨는 남들이 하는 이야기와 거짓 운명에 속은 것이고, 사랑에도 속은 것이네요."
"그런데 세상이 나의 글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원망만 했어요. 인맥 있는 사람끼리 해 먹는다며 불평만 했지요." 덕천이 한숨 쉬며 말했다.
"제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천 씨가 낚싯바늘에 주둥이가 걸려 버둥거리는 붕어 신세가 된 거였네요. 자신이 자신을 속인 것인지, 세상을 속이려고 하다 낚시 바늘을 물은 것인지는 몰라도..." 대섭이 말했다.
항상 검은 점퍼를 입고 털모자를 쓰고 다니는 여자가 이야기했다. "덕천 씨 가슴 아파하지 말아요. 내가 책상을 준비해 줄게요. 오늘 한 이야기를 소재로 소설을 써 봐요. 생존의 치열함, 비루함이 이제 온전히 당신 것이 되었잖아요. 그것을 정직하게 이야기해 낭만으로 만들어 봐요. 비록 유명한 작가가 되지는 못해도 당신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글은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이 먼저 자신의 글에 만족하는 독자가 되면 그것으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난 오늘 예배하며 그 일을 돕는 자가 되기로 기도했어요. 여기 모인 모두도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무언가 작정하거나 결심한 것이 있지 않아요?"
"수고한 덕천에게 박수 한번 보내 주지요." 유천이 말했다. 모두 힘차게 박수를 쳤다. "덕천, 덕천, 덕천, 덕천"을 함께 외쳤다.
아무도 기도에 대하여 질문하는 이가 없었다. 예배에 대해서 묻는 이도 없었다.
"타 다다다다" 오토바이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파킹낫으로 눈을 돌렸다. K 리쿼스토어에서 제공한 점심 도시락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