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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연 Oct 30. 2020

어느 날의 편지

_ 생의 소묘

ⓒ서정연


창밖으로 갑자기 비가 쏟아지네요. 세상을 등지고 돌아서버리는 사람의 뒷모습처럼 말이에요. 가로등 불빛 아래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들. 아주 짧은 순간 반짝이다가 허공에서 곧 흩어지는 비의 파편들. 그건 나에게 누군가의 표정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죽음이라는 차가운 강물에 뒤돌아보지 않고 온전히 몸을 내맡겨버린 너를, 나는 언제나 두려워했다고.


언젠가 녀석의 얼굴을 그리던 날이 있었어요. 어느 날 밤, 그 애는 야구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는 나를 찾아왔어요. 방 안에는 스탠드 불빛만 켜져 있었고요. 나는 녀석의 얼굴에 담긴 빛과 그림자를 그려내고 싶었거든요. 그 애에게 모자를 벗으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잡았어요. 합판 위에 종이를 펼치고 연필을 단단히 쥔 뒤, 가볍게 스치면서 조금씩 형태를 잡아나갔죠.


녀석은 내내 아무 말이 없었어요. 자기 무릎 위에 모자를 얌전히 올려놓은 채 이쪽을, 내 손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만 응시하고 있었죠. 그때 방 안은 온통 빛과 어둠뿐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빛을 이용해 마스크를 떠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어둠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빛을 얇게 저며 내는 것 같기도 했고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 완성된, 그토록 희고 고요한 얼굴. 아, 녀석의 형형하던 눈빛. 어둠 속에서 빛나던 그 눈동자가 팔딱이는 삶을 향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는데, 실은 사라짐 직전에 타오르고 있던 마지막 불꽃같은 것이었을까요?


내가 사랑했던 그 얼굴이 물결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어요. 이제까지 나는 많은 것들을 그려왔는데, 이상하게도 뭔가를 하나씩 지워온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주위의 많은 것들이 지워지고,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도 지워져가는 것만 같네요. 비를 머금은 바람 한 줄기가 가볍게 내 이마를 훑고 지나갑니다. 바람 속에는 무수한 이미지들이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있네요. 전부 내가 되살려내고 싶었던 것들이지요. 캄캄한 창밖으로 빗줄기가 세밀하게 붓질하듯이 세상을 적십니다. 나는 여전히 녀석이 살아서 돌아오는 꿈을 꿉니다. 연필이 사각거리면서 나머지 생을 완성해 갑니다.


그때에야 나는 비로소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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