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타이프]
나는 지금 황량한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이층 창가에 앉아 이 글을 쓴다. 들판과 나 사이에는 비좁은 도로가 가로지르고 있고, 자동차와 짐을 실은 트럭, 자전거를 탄 사람과 오토바이 배달부가 그곳을 드문드문 지나간다. 창문 바로 밑에는 얕은 개울이 흐르는데, 며칠 전 어떤 남자애가 울타리에 기대서서 한참이나 물속을 바라보다가 나무 막대기를 힘껏 내던지고는 가버리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들판이다.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그곳에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흙빛에 가까운 풀 무더기와 삼각 모양의 구간에 자리한 늙은 갈대들, 멀리 조그마한 집들과 산이 보이는 곳까지 거의 아무 것도 없는 땅이 드넓게 펼쳐져 있을 뿐이다. 간혹 근처 농가에서 풀어놓은 듯한 개들이 뛰어다니거나 어디선가 날아든 큰 새가 갈대밭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한쪽 구석에는 누군가가 경작하다가 만 밭이 생기를 잃고 방치돼 있다. 지금이 겨울이라 그런 건지도 모른다.
이윽고 밤이 찾아오면 산 아래 자리한 농가에 하나, 둘씩 불이 들어온다. 그 사이에 들판은 새까만 어둠으로 변해버린다. 시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내 눈에는 어둠 속에 일렬로 늘어선 그 불빛들이 항구의 표시등처럼 흐릿하게 번져 보인다. 내가 들어앉아 있는 방 안은 바다 한가운데를 표류 중인 작은 배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둠에 점점이 박힌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물결을 따라 느린 속도로 계속 떠내려가고 있는 것만 같다.
대낮에 강한 바람이 불어와 갈대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쏠리는 것처럼, 어두컴컴한 들판에서도 무엇인가가 일렁거린다. 나는 가만히 그것을 주시한다. 간혹 허공에다가 시선을 두기도 하고, 검은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오래 바라볼 때도 있다. 당분간, 어쩌면 꽤 오랫동안 이 풍경에 마음을 기대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린다. 밤의 고요 속에서 물결처럼 일렁이며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어둠, 그리고 한 점 희미한 불빛을 찾아 나는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