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타이프]
지금 내 눈앞에는 합판 위에 넓게 펼쳐진 종이와 연필 한 자루가 있다. 나는 양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한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배어 있는 움직임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몸 전체가 깨어나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나른해지는 듯도 싶다. 그렇게 익숙한 나의 세계로 곧장 들어간다.
종이에 손날을 대고 스치듯 이리저리 연필을 움직이며 그리고 있을 때, 나는 내 손가락들이 가느다란 촉수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온몸의 신경이 손가락 끝으로 모이고 그것들이 민첩하게 종이 위를 떠다니는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나라는 인간이 하나의 주먹으로 응축돼 나머지 부분은 점차 사라지고, 단지 손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거친 질감의 종이 위로 스윽 하고 연필심이 지날 때, 메마르고 갈라진 땅 같은 울퉁불퉁한 표면에 부딪혀 흑연가루가 여기저기 튈 때, 그곳을 무대 삼아 부지런히 오가는 내 손의 미끄러짐은 일종의 춤과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무한한 선의 확장은 나 자신의 확장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간해서는 움직이는 손을 멈추고 싶지 않다. 아주 잠시도 머뭇거리고 싶지 않다. 쥐고 있는 연필에 조금씩 힘을 가하다가 그대로 종이를 뚫어버리고 싶은 강렬한 감정에 휩싸일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