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ako from Spain
“Some people are worth melting for.”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녹을 수 있어.
영화 <겨울왕국>에서 눈사람 올라프는 친구 안나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한다. 모닥불 앞에서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가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위해서는 기꺼이 녹을 수 있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그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또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줄 친구가 있을까?
고맙게도 그 순간 떠오르는 친구가 있었다. 동글동글한 이목구비와 크고 선한 눈망울까지 올라프와 닮은 그의 이름은 올라코. 어쩜 이름마저 꼭 닮은 그를 나는 낯설고 먼 땅 스페인에서 만났다.
인천, 모스크바, 마드리드를 거쳐 꼬박 하루 동안 이동한 끝에 도착한 순례길 첫 도시, 팜플로나Pamplona. 나는 이곳에서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고, 우체국을 찾아 여행 후반에 필요한 짐을 레온León으로 부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으니 그날이 바로 크리스마스 당일이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당찬 포부를 가지고 입성한 첫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신세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체국은커녕 문 연 상점조차 거의 없는 스산한 거리를 무거운 배낭을 앞뒤로 메고 하염없이 걸었다. 크리스마스가 이 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명절인지 온몸으로 깨달으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드문드문 보이는 현지인들을 붙잡고 알베르게의 위치를 물어보는 것뿐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알베르게가 어디 있는지 당연히 알 것이라 생각했다. (팜플로나가 인구 20만의 큰 도시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알베르게의 위치는 고사하고, 당최 ‘알베르게’라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겠다는 듯한 그곳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어깨를 으쓱하는 서양인 특유의 제스처로 모른다고 하는 무심형. 둘째,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정보를 찾아 알려주려고 애쓰는 친절형. 마지막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엉뚱한 곳을 알려주는 쓸데없는 오지랖형! 이 쓸데없는 오지랖형들 덕분에 정확히 한 시간 정도를 더 헤맸다. (제발 모르면 모른다고 하자.)
이제 더 이상 물어볼 힘도 없다고 느끼던 그 순간, 검정색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가방을 멘 한 남자가 성큼성큼 내 앞을 지나갔다.
“¿Dónde está Albergue?”
알베르게가 어디예요?
생존 스페인어로 “Where is~?”에 해당하는 “¿Dónde está~?”를 외워갔을 뿐인데 그는 내가 스페인어를 할 수 있다고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었다. 줄기차게 이어지는 그의 스페인어 폭격에 머리는 하얘지고 이번에도 알베르게 찾기는 글렀다 싶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이 남자, 앞서 겪은 세 가지 유형과는 차원이 다른 유형이었다. 한마디로 사명감에 불타는 형! 그가 바로 나에게 찾아온 첫 번째 기적, 올라코다.
그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몇 번 해보더니 안 되겠는지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그와 대화를 시도했지만 나는 스페인어를 전혀 못 하고 그는 영어를 전혀 못 해서 소통이 거의 불가능했다. 손짓, 발짓, 그림까지 동원해 대충 파악한 결과 그는 대학원생이고 학교에 공부하러 가는 길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대학원생이 이렇게까지 영어를 못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니! 유치원생도 영어를 못하면 사는 데 지장이 많은 나라에서 온 나는 그저 부러웠고 한편 슬펐다. 영어든 뭐든 빡세게 배워야 살아남는 줄 알았는데 이들의 인생에는 애초에 빡셈이란 없는 듯이 보였다.
그렇게 또 올라코와 함께 얼마나 길을 헤맸을까. 겨우 도착한 알베르게는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이쯤에서 공부하러 가던 길 가라고 한국에서 챙겨온 기념품을 주고 헤어지려고 하는데, 그는 ‘네가 길을 찾기 전에 난 공부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정도의 느낌으로 여전히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결국 여행안내 센터를 기어이 찾아내어 순례자 여권을 만드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하지만 나의 천사, 올라코의 호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