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없어져버린 신입의 패기
100군데 탈락하고 딱 한 곳 취업에 성공한 문돌이
나는 그래도 서울에 나쁘지 않은 대학교를 졸업했고, 남들 다 따는 부질없는 자격증 몇 개, 봉사활동 시간, 덧붙여 외국 유학 경험도 있었다. 그리고… 문과생이다.
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취업이 늦은 편이었다. 서류에서 탈락하는 게 100개라면 체감 상 200개는 탈락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탈락’ 메일을 보는 게 속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계속 탈락을 거듭하니 그냥 별생각이 없어질 정도였다.
귀하의 역량을 높게 사지만 … 우리와 함께할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아니 도대체, 내 역량이 그렇게 높으면 데리고 가야지 왜 함께 할 수가 없다는 거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은 충동적으로 일어난다고 하더니, 나도 내 첫 번째 인생의 기로에서 충동적으로 친구들 따라 선택해서 이런 벌을 받나 싶었다.
고1 때, 문과를 선택한 일 같은 것 말이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 하도 탈락을 많이 하니까, 페이스북에 이런저런 심경 글을 많이 썼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며 살다가 나라를 다 말아먹었는데 나도 문과네… 이과 갈걸…
인터스텔라 감상평: 역시 세상은 이과가 구한다!
나는 이러다 편의점 창고 뒤편에서 캔 음료나 밀어 넣다 죽게 생겼다.
어차피 당장은 취업도 어려울 것 같아서 어이없게도 그냥 호주행 편도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한바탕 호주에서 굶다 돌아와서는 영어 강사를 하다가… 또 재미가 없어서 그만뒀다.
8개월 정도를 놀았는데,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하다 보니 돈이 떨어져서 그때부턴 집에 누워서 TV만 보면서 이력서를 썼다.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승무원 모집이 상반기/하반기 취업 시즌 사이에 ‘중반기’라는 이름으로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지원했다가 덜컥 붙어서 유니폼의 세계로 갈 뻔도 했지만…
다큐멘터리 다시 보기를 하다가 우연히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를 보았고, “이런 회사가 있네”하며 식탁에 앉아 노트북으로 채용 공고를 확인해 보니 마침 모집 중이라 지원서를 썼다.
그리고 꼭 한 달 뒤, 나는 그 회사에 첫 출근 했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곳 아니야?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S 전자 급의 회사는 아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와 정말 그 회사에 다닌다고? 진짜 좋겠다!”라는 부러움 섞인 이야기를 듣거나, 종종 취업 준비생들이 어떻게 하면 이 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는 정도의 나름 겉보기 괜찮은 회사다.
그래서인지 내가 회사 일로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면 가족들부터 친구들까지 “그 좋은 회사를 왜 그만두려고 하는 거야? 어디나 다 똑같아. 그냥 좀 더 참아봐.”라고 말했고, 심지어는 먼저 퇴사한 동기나 선배들도 (딱 50대 50으로 갈리긴 하지만) “여기저기 다녀봐도 그만한 데 없어. 좀 버텨봐.”라는 이야기를 듣기 일쑤였다.
누구나 다 힘들고 어디나 다 어려우니까 나약하게 굴지 말고 참으라는 소리.
나는 그 소리에 자신을 가스라이팅 하며 “그래 맞다. 나 같은 사람이 이 회사보다 좋은 회사를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출근 버튼을 눌렀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사실 회사에 어떤 불만이 있느냐고 물으면 딱히 그럴만한 것도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주변엔 좋은 동료가 가득했고 회사에서 주는 급여나 복지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일이 재미가 없어졌다.
내가 해 놓은 프로젝트에도 더는 정이 붙지 않았다. 왜 해야 하는지 모를 반복적인 수명 업무들을 퀘스트 깨듯 쳐내고 나니, 분명 오늘 하루도 너무 바빴는데 이렇다 할 해놓은 일도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팅을 위한 미팅을 하고 보고를 위한 보고를 해오고 있었다.
최근 반년 정도는 새벽 2시에 퇴근하고 아침 6시에 일어나며 바쁘게 움직였는데, 그래서 내가 무얼 했나 돌아보면 빵빵한 초과근무 수당을 받은 것 말고는 떠오르는 것도 없을 지경이었다.
가족들은 바로 옆에서 나를 지켜봤음에도 내가 그만두고 싶다고 하면 섣불리 “그래, 그만둬.” 소리를 해 주지 못했다. 나는 특별히 미련이 없는데 주변에서 너무 아까워했다.
수개월 동안 먹던 약 봉투를 걸린 이후에야 쉬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참을성과 끈기가 부족한 탓인지, 취업 준비생 시절 그렇게 힘들고 스트레스받던 걸 따뜻한 밥 좀 먹었기로서니 다 잊어버린 탓인지.
남들 말 다 모르겠고 그냥 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