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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Dec 25. 2022

나의 2022년, 그리고 업무수첩의 작은 특이점들

가즈오 이시구로

올해 처음 업무수첩을 쓰기 시작했다. 팀장이 되고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그간 수첩을 쓰지 않은 별다른 이유가 있었을까마는 실무자땐 그다지 수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연초에 기획부서에서 직원용 다이어리를 배포하지만 내 몫은 늘 책상 한편에 덩그러니 꽂혀있기만 했다. 써 보려고 몇 번 끄적거려본 적도 있지만 대체로 적을만한 껀덕지들이 없었다. 팀장의 지시나 전달사항은 충분히 소화할 메모리를 장착하고 있었으니까.


수첩은 상명하달식 업무구조의 표상이다. 근엄한 오너와 수첩을 들고 열심히 적어 내리는 회의 풍경은 어디서나 익숙하다. 세상 한심한 무능의 상징이라고 여겼던 이 장면에 내가 캐스팅 줄이야.  팀장이 되고 나니 상황에 따라 과장님을 대신해 업무회의에 참석하는 날이 종종 생겼다. 보통 공직사회에선 월요일마다 주간업무 보고 시간을 갖는다. 실과장님들이 모두 모여 그 주의 업무에 대해 간략하게 보고하고 지시를 듣는 시간이다. 이 보고를 통해 타 부서에서 어떤 일을 진행하고 있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현재 조직의 현안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시간들은 관료적 정보의 뷔페타임에 불과하다. 이것을 성의 있게 접시에 담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해당 실과장의 지적 호기심에 달려있다. 별 생각이 없으면 무시하는 거고, 자신의 역량과 그 역량에 기대고 있을 둥지 속 새끼들이 신경 쓰이면 부지런히 적고 메모하는 것이다. 대개는 타 부서의 업무에 관심이 없다. 진짜 펜이 바빠지는 시간은 아무래도 오너의 마지막 전달사항이다. 모두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적어 내린다. 누군가는 진짜 메모를 하고 누군가는 피카소가 돼 가고 있을 것이다.


회의가 끝나면 실과장 들은 부서에 돌아와 각 팀장들에게 회의내용을 전달한다. 이때야 말로 수첩이 제 기능을 다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돌아서면 까먹는 시기 아닌가. 매일 보는 직원 이름도 가끔 가물가물한데 뭐라도 적지 않고서는 저장된 메모리를 꺼낼 수 없다. 수첩의 일차적 이용은 여기까지다. 적고 읽어주고. 듣고. 그래 잘 알았고 이제 더 할 말 없으면 해산.


올해 첫 장을 들춰 봤다. 1월 3일 메모다. 어이쿠 한 해 목표를 적어놨네. 기특도 하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가 등록이란 메모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올 한 해가 그냥 다 용서된다. 그래 올브런치 작가등록에 성공했었지. 훗.



3월 16일이었다. 업무수첩에 적어놓을 만큼 꽤 고대했던 목표였는데 저 메일이 날아드는 순간 꺄하고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필 그날 인사발령이 있었고 작고 귀여운 우리 막내가 그만 팀에서 하차했다. 서로 놀라 눈만 껌벅껌벅하다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전혀 표정관리가 안 되는 막내를 두고 차마 저 기쁨을 표효할 수는 없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오늘 내가 한 잔 쏜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하고 술자리에 앉아 '오늘 뭔 일 있어요' 하고 물으면 쑥스러운 듯 뻐기며 '나 작가야' 하고 빵 터트릴까 했더만.


브런치 속 다양한 작가들을 만나는 시간들은 매우 좋았다. 글을 읽기 전에 꼭 작가 소개란을 먼저 읽었다. 작가 타이틀을 얻고 나서 어쩐지 더 좋은 글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았다. 우연찮게 같은 날 합격한 작가 한 분을 알게 되었고, 이 분의 글을 기상 알람처럼 읽어가며 조금씩 구독자와 구독하기를 늘려 나갔다. 매일 편지글 형식의 독특한 글쓰기를 올리고 계신 작가님 한 분은 지금까지도 많은 동기부여가 되고 있다. 위트와 성실함이 돋보이는 분이다. 이번 10회 브런치 대상 작가 중 한분은 나와 같은 취미를 공유하고 계신 분이어서 더욱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망설임 없이 구독하기를 눌렀다. 웨이트에 대한 글쓰기는 나도 한 번은 시작해 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터였다. 웨이트 자체의 대중성은 커진 반면, 이 운동의 사유와 철학에 대한 내용은 별로 없어서 좋은 소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글을 시작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수상한 글은 밤새 완독하게 할 만큼 재밌고 매력적인 사유로 가득했다. 완독을 이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대단한 역량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글쓰기와 관련해 이전부터 깊이 의식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글쓰기 플랫폼으로 보자면 그는 우리 쪽 상대 라이벌 진영에 속한 블로거이다. 그간 온라인상에서 많은 글과 정보를 접해왔지만 이렇게 양질의 쓰기, 주관적 평가하에선 정보의 유용성과 문학적 수사를 가장 이상적 비율로 배합하고 있는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냐면 이 사람과 프로젝트를 한번 해보고 싶어서 실제 만나보기까지 했다. 그가 여행 중에 올린 아일랜드의 식민 역사와 아픔, 그리고 거기서 오는 역사관의 갈등과 아이러니들이 우리나라의 그것과 비교되어 깊은 통찰을 보여줬고, 나는 그의 글에 감명받아 충동적으로 메일을 보냈다. 그로부터 곧 답장이 왔으며, 나는 그가 여전히 여행 중인 줄 알았으나 그는 귀국한 지 조금 되었으며, 우리의 글쓰기가 업로드의 시차 속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손을 맞잡은 것과 같다며 서로 웃었다. 나로선 굉장히 이례적인 케이스였으며, 멋진 일이었다. 지금도 수첩 속엔 그와 나눈 이야기들과 프로젝트 문답들이 남아있다. 업무적으로 이용되던 통상의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인맥의 오솔길에 접어든 느낌이었다. 낯선 길 위로 쏟아내리는 햇살 같은 긴장과 공기에 삶이 더 충만하게 느껴졌다. 비록 그와 프로젝트를 이어나가진 못했지만 투자유치와 관련해 마음먹었던 연재 하나를 완성했다. 좋은 성과였고, 준비된다면 언젠가 다시 그와 협업해볼 생각이다.


웨이트는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주 3회를 지켜오다 최근에 와서 엉키고 말았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너무 무리하지 않으려 한다. 그건 변명이라고 오이씨! 옆에서 아내가 비웃는 듯하다


두괄식 업무추진 1개 하기와 관련해서는 5월쯤에 쓴 글을 소개한다.

항상 틀릴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특히 내가 틀릴 수 있다는 범주는 업무 영역 외에 인간에 대한 판단, 또는 삶의 가치나 철학 등도 포함하는 광범위한 범주여서 나는 요즘 매우 폭넓게 흔들리고 고뇌한다.

최근에 들어서 이러한 습성이 리더십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는 결론을 내렸다. 때로 리더는 이기적이어야 하고, 틀렸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의 이기는 사전적 의미의 이기가 아니라 판단의 관점을 오롯이 나에게만 초점을 맞춘다는 의미이다. 이럴 때 리더는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할 수 있으며, 그러한 집중은 유혹에 흔들림이 없다. 유혹에 흔들림이 없으니 상황의 변화나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일관되게 일을 추진하는 뚝심이 생긴다.

나는 이 뚝심이 갖고 싶다
올 한 해 이 뚝심을 갖기 위해 내가 맡은 업무 중 하나 정도를 두괄식으로 미리 결론지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결론이 비록 틀리더라도(물론 고심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는 조건하에) 한 해 동안은 그 틀린 결론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이고자 한다. 그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어서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범주라면 나는 그 틀린 결론을 고수하면서 내게 던져지는 일종의 돌팔매들, 어쩌면 사실은 누가 내게 던지는 돌팔매가 아니라 내가 내게 던져왔던 돌팔매들,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스스로 보게 되는 눈치들을 온몸으로 맞아보겠다고 다짐했다.

- 2022년 1월의 다짐을 5월에 챙겨보면서 -

지금 보면 이 다짐도 그럭저럭 잘 지켜오다 연말에 무너졌다. 업무 수첩의 가장 최근 페이지쯤에 와서는 그 고뇌와 번민들이 잘 드러나 다. 올해 들어 제일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 조직과 위계가 두르고 있는 커다란 벽과 마주할 때가 있다. 그 높이와 넓음 앞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처자식이 없는 홀홀 단신이라면 그것을 향해 용기 있게 오함마를 내려칠 수 있을까. 제도와 관습에 선전포고하는 일이므로 매우 외롭고 고되고 오랜 싸움이 될 것이다. 용기와 끈기가 부족한 나로서는, 아마도 첫 번째 날아온 돌팔매에 피를 흘리며 쓰러질 것이다. 33명의 민족대표께서 통탄하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유약함이 부끄러워 평생 트레이닝하고 글을 써야 하는 운명이라면.


수첩의 입장에서 보자면  내가 를 펼치고 옆구리에 써 내린 1년의 일과들은 적고 적힌다는 행위를 통해 의미 있는 한 해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행위로 인해 나의 내면에는 분명 무언가가 일어났다. 그것은 매우 만족스럽고, 조용하면서도 내밀한 계시의 불꽃으로 지금도 일렁거리고 . 마침내 나는 전환점을 맞이한 것 같다.  




- 2022년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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