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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Aug 31. 2022

나이 들고 가난한 이들의 연애(작자 미상)

백석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글을 쓴 적이 있었죠.


제목은 '백석 시인은 술을 좋아하셨나?'였는데, 그때 적었던 소제목이 '백석을 사랑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였습니다. 이 소제목은 사실 제목으로 쓸까도 많이 고민했습니다만, 다소 평범한 것 같아 소제목으로 슬그머니 강등시켰습니다. 사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이 소제목이었는데 말이죠.


제가 백석을 좋아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큰 것은 위 글의 말미에도 밝혔지만 '모두가 욕심 사납고 지게 굳은 세상에서 그런 세상을 버리고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고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란 그의 처연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기개와 신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 글 '백석 시인은 술을 좋아하셨나?'는 사실 이 욕심 없이 흰 것들이 좀 더 세상에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쓴 글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천대받지 않고, 굳이 신념에 대해 증명하거나 변명하지 않아도 그 뜻을 존중해주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나눌 수 있는 - 백석의 외로움을 공감하는 -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란 의문에서 시작한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말 포털 커뮤니티를 둘러보다 저는 이런 글을 만났습니다.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목 : 나이 들고 가난한 이들의 연애(작자 미상)


몇 주 전에 눈이 펑펑 내린 날, 노가다를 하고 와서 온 몸이 쑤신다는 중년의 남자 친구 등을 밟아주며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어줬어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남자 친구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눈은 푹푹 내리고, 저는 조근조근 밟고....

제가 예전에 결혼생활을 했을 때, 신혼은 낡은 아파트에서 시작했었죠. 겨울이면 추워서 창문에 비닐을 둘렀는데 창틀이 워낙 낡아서 바람이 불면 비닐이 붕붕 부풀어 올랐어요. 둘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그걸 보고 있음 한숨이 나왔죠. 전 남편은 평생 이런 집에서 살면 어쩌냐고 우울해했지만 제가 그랬어요


"걱정 마. 우린 아주 좋은 집에 살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지금이 그리울지 몰라."


훗날 우린 정말 좋은 집에서 살게 됐지만 제일 좋은 집에 살 때 우리 결혼은 끝이 났어요.

이혼을 하고 만난 남자 친구는 사업이 안 풀려 요즘 형편이 어려운데 그냥 있는 그대로의 이 사람과 이 상황이 그리 싫지 않습니다. 일이 잘돼서 돈이 많아지면 또 변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럴듯하게 좋아 보이는 것들이 그리 간절하지도 않고요.

그냥 나이 들면 둘이 어디 한적한 곳에 가서 작은 집을 사서 고쳐 살면 어떨까 싶어요.

백석의 시처럼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서.....

그런데 남자 친구는 도시가 좋다네요. 그 나이에 해도 잘 안 들어오는 집으로 이사를 가 놓고는 그래도 도시가 좋다네요. 흠냐.

어쨌든 가난하면 가난 한대로, 나이 들면 나이 든 대로, 어떤 삶이든 다 저대로의 즐거움이 있고 낭만도 있더라고요. 그냥 다 살아지는 거 아닌가 싶어요. 눈이 푹푹 내리는 날 백석의 시를 읽는 정도의 마음이 있으면요.

산골엔들 왜 못살겠어요.




그리고 이 글에는 생각지도 못한 많은 댓글들이 달렸었나 봅니다.

아래는 그 댓글에 대한 원 글쓴이의 답변입니다.





원글에 대한 답글


삽시간에 이만큼 댓글이 달려 깜짝 놀랐어요. 자녀는 없고 동거 아니고 저는 제 집이 있어요. 남친 집에 갔다가 좀 밟아달라길래 밟아줬어요 ㅎ

남친은 백석을 모르고 지극히 현실주의 잡니다. 어떻게든 상황을 개선하려고 애쓰고 있고요. 남친을 생각할 때 한숨이 나올 때도 있지만 우린 결국 찰나를 사는 존재라 생각하기에 오늘 좋으면 됐다 생각하고 넘어갑니다.

달관한 건 아니고 달관했다 한들 그것조차 삶의 수많은 지점 중 한지점일 뿐이겠죠. 이게 또 깨달음의 끝도 아니고요.

저도 백석 평전 읽어서 그의 현실이 어땠는지 알아요. 근데 제가 지금 북에서 재산 몰수당하고 강제노역 중인 건 아니니까요. 사실 게시판 글을 읽다가 저 아래 60대를 들어선 분이 오십 괜찮은 나이니 너무 절망하지 말란 글을 읽고 나이 들어가는데 가진 것 없는 삶이 그냥 추레하기만 한가 그런 생각하다가 눈 오던 밤에 제가 느꼈던 행복을 공유하고파서 써봤어요. 제가 82에 글을 종종 썼는데 돌아보니 주제가 한결같아요.

이혼해도 괜찮더라. 망해봐도 괜찮더라. 다 저마다 괜찮아요. 우리가 가난에 대해, 늙음에 대해, 실패에 대해 조금만 더 예의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저는 지금 괜찮습니다. 모두 그러시길.




멋지지 않나요?

눈이 푹푹 나리는 날 백석의 시를 읽는 정도의 마음이 있는 사람이 정말 있었더랬습니다. 마치 백석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뒤에 달린 응원의 댓글들 또한 너무 인상적이었는데요. 저 82란 커뮤니티가 어딘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즐겨보는 커뮤니티로도 좋은 글이란 응원들이 많이 달렸습니다.

많은 것들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로서 우리가 일상에서 선언하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욕심 없어 희어진 그것들과 기꺼이 동행하고픈 수많은 여러분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분 좋은 하루였습니다.

아울러  살다가 우연찮게 당신을 만나게 되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당신을 위해 저는 기꺼이 술을 한잔 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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