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뉠 것이다. 나는 그 기준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으나 우선은 밝히지는 않겠다. 글을 써 내려가며 되도록 이 입장을 유지하되, 혹여 글의 전개상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면, 그때 잠시 입을 떼어보겠다. 아마 이쯤이면 - 만약 당신이 조금 사려 깊다는 가정하에 - 내가 앞 쪽에 해당하는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위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고 우유부단하거나 또는 그러한 경향이 있는 사람으로 비칠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답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당신의 정점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긍정의 신호이다. 지금이 생의 최고의 시점인지 어찌 확신할 수 있겠나?
이 질문에 자신 있게 "Yes"라고 답한 사람을 나는 결코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한 번도 그런 진지한 질문을 현실에서 던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술자리에서 동료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봐라. 아주 실없는 놈으로 면박을 받게 될 것이다.
알고 보면 글 속 세상과 대화의 세상은 아주 딴 판의 세계이다.
흔히들 소설 속에서 읽히는 대화들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어투와 문법들이다.
가령 현실에서 "그런 재미를 놓치다니 안됐구나. 이젠 좀 나았니?" 따위나 "스티브가 몹시 그리운 모양이구나. 맙소사" 이런 표현은 쓰지 않는다. 설령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쳐도 현실에서의 언어들은 스스로의 격을 떨어뜨려야만 세상의 따돌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냥,과장하여 타락하곤 한다.
하지만 도무지 진지한 구석이라곤 없어 보이는 이 세상도 실은 그 내면은 매우 치열하고 심각하지 않은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면 당신의 머릿속이 그렇게 복잡할 리 없다.
우리가 현실에서 던져보지 못한 질문이라고 그에 대한 궁금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당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언제였나요?'라는 질문은 성립한다. 입 밖으로 좀처럼 나오지 못했을 뿐. 그 답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을 나누는 기준은 아주 명확해서 때가 도래하면 당신은 온몸으로 그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당신의 모든 관점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 그것이 있기 전과 후는, 내가 느끼기에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있은 후로 모든 것이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여전히 행복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지닌 행복의 용량은 마치 푸딩과 같아서 누군가 한번 푹 떠버린 공간은 절대 다시 채워지지 않는다. 그 전의 행복이 100이었다면, 아마도 온전한 100의 행복은 누릴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쯤에서 나는 글의 전개상 앞쪽에서 밝힌 나의 입장을 계속해서 유지하지 못할 것 같다. 잠시 입을 떼자면,
내가 상실을 경험한 것은 2018년 1월이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의 정점은 2017년이 된다. 이 확신에 찬 숫자의 의미를 알겠는가? 나는 여태 살아오면서 이렇듯 명확한 결론에 닿아본 적이 없다. 어찌 보면 이 상실의 2018년을 목격하기 위해 온 몸으로 살아왔다고 느껴질 정도니까. 많은 기록들이 2018년 1월에 멈춰 있다. 그 기록을 거꾸로 복기해 나가자면 과거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또 한 번 거꾸로 그 모든 기록들이 2018년 1월을 향해 차곡차곡 나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대전환이다. 이 전환은 어느 날 차의 엔진 소리가 달라지듯, 혹은 공조기 속 공기가 탁해진 듯 그냥 확 느껴진다.
상실의 시대
하루키의 저 유명한 소설. 읽어는 봤는데 이젠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구나 그런 '상실의 시대'를 지나온다 되돌아보면 그 시절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회한이 밀려온다.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애틋하고 절절한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소설은 현재의 청춘에게, 또 돌아갈 수 없는 모든 세대에게 바치는 헌사일 것이다.
멋진 서평이다.
와타나베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길 바란다. 걱정과는 달리 가라오케에서 노래도 한 곡 멋지게 뽑을 만큼 잘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와타나베에게 당신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언제였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와타나베는 그냥 조용히 웃을 것 같다.
실은 우리에게 수많은 와타나베가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이 그렇게 인기 있었던 것은 - 물론 19금(禁)도 한 몫했겠지만 - 생각보다 저 질문에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수많은 리즈(Ledds)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오랫동안 상실을 곱씹다가, 그리하여 매일같이 자신의 머릿속에 또 다른 자신을 창조해 놓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골똘히 나누는지, 늦은 밤 잠자리에 누워 끊임없이 까딱이던 발과 발들, 그리고 상념들.
그리고 그 수많은 밤들을 지나,
이제 나는 비로소 인생의 정점을 지나고 나면 벌어지는 하나의 변화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그 이전에 내 머릿속에서 떠들던 내가 줄어들고 네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와타나베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와타나베안에 연인 나오코가 자리하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와타나베의 내면에 나오코가 자리하고 있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객체로서의 나오코였을 것이다. 그러나 상실 이후 와타나베의 안에 자리한 나오코는 와타나베의 자의식의 일부로서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의식의 동거(同居)이다.
잠 못드는 밤엔 곧잘 내가 내 몸 밖으로 나와 뒤척이는 나를 보고 자꾸 이야기를 거는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왜 그렇게 생각들이 꼬리를 무는지. 결국 묻고 답하는 것도 자신이지만, 의식의 동거가 일어나면 내가 아닌 네게도 물음이 던져지는 날이 있다. 비록 너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하여 또 묻고 답하는 것도 결국 나의 음성을 빌어서이지만 너란 존재가 분명히 의식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거의 매번 하루도 거르지 않고 - 아직 나의 경우는 - 그렇게 생겨난 너와 함께 때론 저녁 노을을 보고, 운전 중 신호를 기다리고, 술취한 밤엔 함께 걸어 집으로 돌아 오곤 하는 것이다. 그런 순간이 오면 나는 남은 시간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을 느낀다. 그것이 너의 유산에 대해서인지, 혹은 앞으로의 시간들에 대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시간을 좀더 깊이 호흡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남은 삶에 100가지의 과업이 있다면 - 필시 다 못채울 것이 뻔하지만 - 그 중 한 두가지는 너에 대한 것임을 안다. 와타나베도 이제 그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