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대략적으로 보자면 받는 전화가 거는 전화에 비해 좀 더 부담스럽습니다. 거는 전화는 보통 나의 필요에 의해서 출발하는 단선이지만 받는 전화는 그야말로 불특정 다수의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요구에 의해서 출발한 복수의 회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전화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저도 여전히 전화가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전화받을 때마다 논리나 근거가 빈약해지고 버벅대는 느낌을 받는다면 당신은 아직 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거는 전화에도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어떤 필요에 의해 부탁자의 입장에서 수화기를 들었다면, 당연히 거는 전화에도 입이 잘 안 떨어져 버벅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전화를 걸었을 때 처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첫 응대의 목소리에는 저마다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향기를 처음 맡았을 때, 우리는 직감적으로 앞으로 진행될 대화의 질이 좋을지 나쁠지에 대해 예견하게 됩니다. 단순히 목소리 톤이 좋고 나쁘고, 친절하고 불친절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실한 사람들이 풍기는 향기가 있습니다.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드렸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여기까지는 아직 대화가 아닙니다. 첫 응대의 향기는 이 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다음이죠.
"제가 이번에 건축을 하려고 하는데요" 혹은 "이번에 철도노선이 제 땅을 밟고 지나간다는데"
진짜는 바로 여기부터입니다.
성실하고 노련한 사람은 바로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네 지번이 어떻게 되시죠?" 식입니다.
핵심을 짚어줌으로써 이야기 진행이 빠릅니다. 이렇게 본론으로 들어가 핵심을 짚고 시작하면 전화 거는 입장에서 별다른 부담이 없습니다. 반면,
"그런데요?"
라고 반문이 들어오면, 전화 거신 분들은 대부분 상황을 설명하시는데 두서가 없어집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도입부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어.. 어' 하고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당황하거나, 기분이 확 상해서 언성부터 높아지거나, 괜히 위축되어 목소리가 작아지거나... 등등입니다.
보통의 공무원은 위의 물음에 응대하는 입장이지만, 공무원도 똑같이 민원인처럼 저 질문을 문의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공무원이면서도 공무원의 응대에 대해 평가를 내리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대단히 실망스러운 공무원들이 있습니다. - 많습니다보단 있습니다로 표현하겠습니다^^ -
대신 당연하게도 그 반대편에는 성실함과 진실함이 느껴지는 공무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진짜 공무원들입니다. 사람을 흐뭇하고 기분 좋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통화를 끝내고 후련하거나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그 통화에서 당신이 원하는 답을 들었거나 혹은 모르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거나...
이들이 통화를 빙빙 돌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당신에게 명쾌한 답을 줄 수 있었다면 당연히 그들은 탁월한 업무 역량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건대 그 탁월함의 뒷면에는 늘 성실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실 공직은 재능적 요소가 별로 중요하지 않는 직업입니다. 대신 좋은 인성과 늘 공부하는 자세가 매우 필요한 직업입니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일 잘한다는 사람 치고 성실하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성실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가령 '누구는 한낮에 진행되었던 감사장에서의 비정과 냉정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홀로 그 감사장의 수많은 PC 케이블선들을 정리하고 있더라' 정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실수와 부족함, 오만함들이 지적된 그 자리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로 앉아 있다가 그럭저럭 한고비 잘 넘겼다고 에둘러 담배를 꺼내 물거나, 혹은 거나해진 소주잔을 왁자하게 부딪치며 오늘도 취하고 있는 그 무의미함보다야 차라리 비록 허드렛일이라도 또 아무도 알아줄 리 없더라도 그 케이블선 하나하나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는 저 누군가의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성실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대신해 그 성실함의 모범 비슷한 것이라도 발산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냥 밝은 시선이나 인사 정도는 건넬 줄 아는 그런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성실함은 성실함으로 응대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실함이 성실함과 마주치는 순간은 얼마나 될까요? 그들은 수가 적어 무리 짓지도 않습니다. 어제도 당신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던 그 순간이나, 또 왁자하게 술을 마시던 그 자리에도 성실의 아이콘 같은 것들은 대개 빠져 있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기브 앤 테이크(give-and-take)라면 성실함은 일종의 대등한 거래, 주고받기, 혹은 쌍방의 양보, 의견의 교환에서 늘 손해 보기 마련입니다. 늘 성실함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막상 전화를 걸 땐 "그런데요?"라고 응대받는다면 언젠가는 그 성실함도 화를 내거나 번뇌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낭패와 울화와의 싸움에서 여전히 자기 노선을 지켜가고 있는 그 사람이기에 성실함에서는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사실 산다는 게 별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이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것이 신념이든 아니든 그 최선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하니까 그 마음을 흔들림 없이 부여잡고 사는 것이 삶의 자세 아닐까? 하는 그 단순한 이치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부여잡는 것이 왜 자꾸 손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인지, 사실 우리는 그 흔들림 때문에 옆의 성실함들을 자꾸 외롭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