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왜 이렇게 아이들이 예뻐 보이는지 모르겠다. - 나이 먹어 그렇다는 얘기는 하지 말자 ^^-
신생아보단 조금 더 성장한 4~5살 정도의, 이제 막 걷는 것이 한창 재미지고 용케 대화도 제법 시도해오는 이 생명체들과 교감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나를 들뜨게 한다. -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다. -
똘망똘망 올려보는 그 얼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이제 막 만들어진 빨간 입술과 혀와 입속의 분홍색 살들, 그리고 빼꼼 올라온 귀여운 상아색 이빨들의 순정 상태에 온 정신을 빼앗기기 일쑤다. 이것이 어디 구강구조뿐이겠는가? 그 속을 가만히 따라가면 작은 위와 간과, 심장과 폐와 소장과 대장들도 이제 어엿한 신체기관들이라며 꼼틀꼼틀 그 기능을 뽐내고 있을 것이다. 상상 속 이 모든 박동들은 얼마나 싱그럽고 생기 있는가?
그런 깨끗한 기관들이 이제 막 제 소임을 다하려 음식과 공기와 소리와 빛에 반응하며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그야말로 작은 소우주에 다름 아니다. 나는 막 그 세계를 함박 미소와 함께 들여다보고 있다.
처음 아이가 태어나 깨끗한 이유식을 먹을 때는 그 똥내도 별로 역하지 않다. 엄마 젖을 떼고 처음 접하는 이유식들, 간이 전혀 안된 으깬 단호박이나 감자며, 데친 시금치며, 브로콜리며를 갈아 작은 숟가락에 떠먹여 내고 받는 그 배설들은 아직 무엇으로부터도 오염되지 않는 것들이다. 깨끗한 재료들이 깨끗한 기관들을 지나 그냥 밖으로 나온 것뿐이니까. 그 옛날 부모 자식 간 사랑의 최고의 경지인 '자식의 똥이라도 기꺼이 먹을 수 있다'는 이 시기의 배설을 말하는 것일 테다. 아무렴 다 큰 자식의 똥 일리가.
이 때묻지 않은 순정의 세계를 더럽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와 당신과 우리의 세계다. 욕망과 욕심, 그리고 자본이 대량 생산해낸 인스턴트, 담배, 알코올, 스테로이드 등으로부터 우리 아이들은 차츰차츰 노출된다. 아무리 애써본들 이 세상 속에서 자라나려면 어쩔 수 없이 발 딛어야 할 공간이다. 다만 그 세계로의 입성을 하루라도 늦추기 위해 오늘도 부모님들은 여전히 애를 쓰고 있지만 사실 이 노출과 싸우고 있는 당사자는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아이들과 신체기관들이 세상의 자극과 싸워나가는 첫 시기에 튀어나오는 표현들은 그야말로 놀랍고 투명하며 창의롭기 그지없다. - 어른들의 그 요란한 잔소리, 야단, 욕설에 비하면 -
"아빠 귀가 점점 멀리 가는 것 같아요."
뒷자석에 앉아있던 아이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뭐라고?" 고개를 한껏 돌려 되물었으나 아이는 "아빠 귀가 점점 멀어져 가고 있어요" 라고만 했다.
순간 즉각적으로 이 상황에 대해 이해한 것을 나는 아내에게 두고두고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것은 기압 차이에서 오는 고막의 먹먹함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방금 막 고도가 높은 고개 하나를 넘어가고 있는 중이었는데 아이 귓속 중이강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기압차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나 보다. 그 다급한 상황에서 튀어나온 외마디가 바로 저 '귀가 점점 멀어지고 있어요'다.
"자, 아빠처럼 집게손으로 코를 꼭 쥐고 살며시 '흥' 하고 해 봐" 아이는 두 볼이 곧 빵빵해지긴 했지만 좀처럼 압력이란 걸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나는 이 의외의 상황이 즐겁다 못해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이제 막 언어를 깨우치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한정된 단어 조합으로 만들어 내는 이 의외성들은 놀라울 정도로 참신하고 창의적이다. 한 번은 아이의 일기를 보고 탄복한 적도 있는데 - 지금은 자세한 앞 뒤 정황이 기억나지 않지만 - 그림일기의 아래쪽에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로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란 표현이 있었다. 이 때는 아이가 막 어린이집을 다니던 시기로 어떤 상황에서 자기보다 어린 동생을 달래며 일종의 관용, 용서, 뿌듯, 긍지 등의 한 감정을 느낀 듯한데 그것을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날의 일기에 등장한 이 순두부 같은 '부드러움'은 그 어떤 관념의 단어보다 내 마음을 울렸다. 솔직히 감동받았으며, 어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지 아이의 표현이 어른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은 친구 중 한 명이 "또라이야?" 하고 못된 말을 던진 적이 있나 본데 아이는 "도라에몽?"하고 웃으며 되물었다고 했단다. 엄마가 한글을 못 읽어서 "넌 까막눈이야" 라고 놀렸더니 "엄마 눈동자에도 까만 게 있어요. 엄마도 까만 눈이에요"라고 천진한 답을 들려준 적도 있다.
나는 가끔 만나는 호기심 많은 어린 얼굴들을 들여다보며 오늘도 웃으며 후회하며 반성하고 있다.
천진했던 아이는 그 옛날 참신했던 표현을 언제 쓰기라도 했냐는 듯 입이 걸걸해지고, 매운 떡볶이를 즐겨먹으며, 콜라와 햄버거에 환장하고 있다. 아직 술과 담배는 안 하지만 그 옛날 귀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는 외마디는 어쩐지 점점 더 진짜로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오늘 너에 대해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