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여니 우체국 택배 상자가 덩그러니 복도에 놓여있다. 올 택배가 없는데 설마? 하고 상자 겉면에 이름을 확인한다. 매직으로 쓰인 익숙한 글씨체다. 보내는 사람은 친정엄마 이름이 쓰여있고 받는 사람은 우리 아이 이름이 적혀있다. 오전 11시경 도착한 택배를 저녁 6시에 아들이 올 때까지 개봉하지 않는다. 받는 사람이 내가 아닌 이유도 있지만 열어보고 싶지 않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짜증이 난다.
택배 보내지 말라고, 40분 거리에 떨어져 사니까 가서 받으면 되지 귀찮게 왜 그러냐고……. 엄마가 택배를 보낼 때마다 툴툴거렸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손주 선물 사는 것이 삶의 낙이라고, 택배를 열었을 때 꺄~~아 소리지르며 신나 할 녀석의 얼굴에 덩달아 신난다며.
내 돈으로 내 손주 선물 산다는데 네가 왜 난리냐고 버럭했다. 우리 엄마, 아이의 외할머니는 그런 사람이다. 손주가 갈 때마다 선물을 사주고, 떠날 때는 반드시 5만 원짜리 신사임당을 두 손에 쥐여주는, 모든 걸 다 퍼주는 할머니. 그래서 우리 아이는 친가보다 외가 가는 것을 훠~얼씬 좋아한다.
나에게는 그런 할머니가 없었기에 심통을 부리는 걸 수도 있겠다. 나의 친할머니, 외할머니 두 분은 아들이 귀하고, 손녀보다는 손자가 최고인 옛날 분들이셨다. 친가에서는 삼촌의 아들 두 명에게 우선순위가 밀렸고, 외가에서는 외삼촌의 아들에게 외할머니의 사랑을 빼앗겼다.
외가는 충청도 부여라서 1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곳이었는데 오랜만에 가도 그랬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방학 때 기차를 타고 동생과 둘이서 외갓집을 방문했다. 일주일 정도 있다가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마침 큰외삼촌의 아들 돌잔치가 있었다. 외할머니는 일주일 내내 시장을 들락거리며 손자의 돌잔치를 준비하시느라 정신이 없었고 우리 자매는 안중에 없었다. (그때는 외숙모가 일을 해서 사촌 동생들을 외할머니가 돌보고 있었다) 돌잔치 당일 한복을 입은 사촌 동생이 참 예뻐서 무심코 한복 끝을 손으로 만졌다. 그러자 갑자기 외할머니가 나의 손을 '탁' 치며 욕을 하셨다. “이년아, 만지지 마라! 이렇게 중요한 날 부정 탄다.” 그 장면 그 목소리가 선명하게 내 머릿속에 찍혀있다.
친할머니도 마찬가지다. 우리 손자, 우리 손자 하는 반복되는 그 소리에 나는 소외감도 느끼고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100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 되어서 맏며느리인 움츠러든 엄마의 어깨를 펴 드리고 싶었다.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패했고 나만의 헛된 상상으로 끝이 났다. 그나마 가랑이 사이에 하나가 더 달린(?) 아이를 낳아서 엄마의 아들 못 낳은 한을 푼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외손주에게 끔찍한 것인가? 끝없는 그녀의 사랑에 질투도 난다. 그 사랑 반만 나한테 좀 주지라는 철없는 생각도 한다.
그림책 『할머니의 감자』를 읽으며 우리 아이와 친정엄마가 떠올랐다. 이야기 속 두 사람의 모습이 많이 비슷하다. 그림책 속 할머니는 손자를 등에 태워 신나게 놀아주고 비가 오는 날에는 바깥 놀이를 할 수 없으니 집에 남은 감자로 인형 만들기 놀이도 한다. 우리 아이의 외할머니도 그랬다. 자기 어깨와 허리에 덕지덕지 파스를 붙여서 파스 향이 진동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3살짜리 외손주를 이불에 태워 거실에서 썰매처럼 끌고 다녔다. 썰매놀이가 끝나면 이불 양쪽을 두 사람이 잡고 그네 타듯이 흔들어 줬다. 아이 아빠도 힘들다고 안 해주는 놀이였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외손자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행복해하며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열심히 이불을 흔들었다. 당신 손목, 허리 고장 나는 줄도 모르고 아이와 눈 맞추며 웃는 외할머니, 즉 우리 엄마의 모습은 이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부지런하게 동영상으로 남기거나 사진으로 못 찍은 게 후회가 된다.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가 자기 이름이 적힌 택배 상자를 보며 좋아한다. 그리고는 칼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허겁지겁 포장 테이프를 뜯어낸다. 상자 안에는 맛밤, 홈런볼, 초콜릿 쿠키 등 아이가 입에 달고 사는 간식, 시리즈 별로 다 모은 엉덩이 탐정 신간, 엄빠랑 틈틈이 하며 똑똑해지라고 사준 보드게임 스플렌더, 아이의 취향은 고려하지 않은 알록달록한 티셔츠, 너무 커서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할 신발 마지막으로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문화상품권 5만 원치가 들어있다. 그걸로 게임 현질을 하고 싶다는 아이를 나는 살벌하게 째려본다. 크리스마스도 생일도 어린이날도 아닌데 외할머니는 자신의 월급으로 손주 선물을 플렉스 했다. 신이 나서 꺅 꺅 소리를 질러 대는 아이의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 반, 짜증이 나는 것 반반이다. 전화해서 듣기 싫은 소리를 하고 싶다. ‘이제 좀 그만 보내시라고, 애 버릇 나빠진다고, 월급 모아서 엄마 가고 싶은 여행이나 가시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전화 대신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과 외할머니께 감사한 마음을 영상으로 찍어서 카톡으로 보냈다. 카톡을 읽자마자 외할머니의 하트 이모티콘이 날라 온다. “우리 00, 할머니가 많이 많이 사랑해.”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 메시지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부모님과 나, 여동생은 서로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최근에는 한 번도 하지 않은 것 같다. 기억 속에 없다. ‘사랑해’라는 말은 아무리 많이 해도 듣기 좋은 말이 분명한데…. 부모님에게는 그 세 글자가 목구멍에서 탁 걸려 나오지 않는다. 돌아가시기 전에 할 수는 있을까? 지금은 죽었다 깨나도 못 할 것 같다. 나에게도 만약 손주가 생긴다면 그 아이에게는 ‘사랑해’라는 말을, 하트 이모티콘을 아낌없이 수백 번, 수천 번이고 날릴 수 있을 듯하다. 아…. 그런데 나는 외할머니가 아니고 할머니밖에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서글프다. 사람들은 대부분 할머니 보다는 외할머니가 더 친근하고 익숙하며 끌리지 않나? 너무 옛날 사람 마인드인가^^;;
-관련 그림책-
감자를 소재로 하여 할머니와 손자의 사랑과 그리움을 재치 있게 포작해 군더더기 없이 유쾌한 감동을 잔하고 있다. 특히 감자에 싹이나 쭈글쭈글해지고 엉망이 되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잡아 점층적으로 강조해서 표현한 장면은 저자의 특유의 오랜 그림책 경험과 재치 있는 유머를 엿볼 수 있다.
금요일마다 둘만의 시간을 갖는 할머니와 잭. 쏙 배닮은 두 사람은 너무나 다정해 보인다. 비가 내리는 어느 금요일, 할머니와 잭은 행복해 보이는 감자 인형을 만들고 자신들도 행복해 한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잭은 할머니에게 오지 않고, 잭이 남기고 간 감자 인형들은 변하기 시작한다. 보기 흉할 정도로 변해가는 감자 인형. 그 후 더욱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데...
-출처 예스24 책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