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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별곡 Aug 02. 2022

무궁화호와 KTX

-그림책 <기차 여행은 즐거워요>를 읽고-

"나 출장에서 돌아오면 같이 가." 신랑은 한사코 우리 아이와 나, 단둘만의 서울행을 말렸다. 길치, 방향치인 아내가 못 미더웠겠지. 그러나 네이버의 길 찾기 기능 하나만 믿고 보란 듯이 KTX 표를 끊었다. 결혼 후 남편 없이 처음 가는 여행이었다. 게다가 우리 아이가 세 살 때 내 친구 결혼식을 가기 위해 기차를 탔으니 9년 만이었다. 아이는 며칠 전부터 '우와 드디어 내가 KTX를 타다니. 친구들에게 자랑해야지'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들어오자마자 아이가 내뱉은 첫마디는 "애걔~ 왜 이렇게 자리가 좁아?"였다. 세 살 때 기억이 없는 녀석에게 KTX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이다. 나는 속상함을 감추며 "응. 좀 좁지? 근데 진짜 빠르다. 서울을 2시간 20분 만에 가잖아. 엄마 때는 기차 타고 다섯 시간 넘게 걸렸어."라고 살살 달랬다. 아이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무슨 기차가 자동차랑 속도가 똑같았냐며 믿지를 않았다. 이놈아 엄마가 너만 할 때는 그렇게 느렸다고~~~

어릴 적 기차여행은 몇 안 되는 행복한 추억 중에 하나이다. 그림책 <기차 여행은 즐거워요>를 읽으며 그 시절이 떠올랐다. 동생과 단둘이서 대전 외삼촌댁에 갈 때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명절마다 할아버지 댁을 방문할 때도 언제나 기차가 함께였다. 차만 타면 멀미를 해대는 나에게 기차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자동차, 택시, 고속버스 모두 특유의 역한 냄새에 타자마자 웩웩거렸다. 기차는 멀미 없이 즐겁게 여행할 수 있는 유일한 이동수단이었다. 명절마다 기차표 대란이라 겨우 구한 역방향 표는 2시간 정도 지나면 머리가 조금 지끈거렸다. 그래도 웩웩 안 하는 게 어디인가! 머리가 아파오면 우리 가족은 교대로 역방향을 앉으며 부산까지 다섯 시간을 달렸다. 


새마을호와 무궁화호의 가격차이가 꽤 났기에 엄마는 항상 4인 가족의 표로 무궁화호를 끊었다. 당시에는 KTX가 없었기에 새마을호, 무궁화호, 비둘기호 순으로 나열하면 두 번째로 좋은 열차였다. 지금은 역방향과 순방향이 나뉘어 있지만 예전에는 좌석의 방향을 돌려서 4명이 마주 보고 갈 수 있었다. ktx의 동반석과 비슷하지만 훨씬 넓어서 다리도 쭉 뻗을 수 있었다. 의자가 빙그르르 돌아가서 네 식구의 안락한 보금자리가 될 때마다 매번 신기했다. 아빠가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사 같았다. 그때만큼은 그가 멋져 보였다. 


열차가 출발하면 30분도 되지 않아 전날까지 일을 한 엄마, 아빠는 곧 숙면을 취했다. 4살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불안도가 높은 아이였기에 집이 아니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다가 눈을 뜨면 나만 덩그러니 놔두고 기차에서 내릴 것 같았다. 영화 '나 홀로 집에'의 케빈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눈알을 굴리며 사람 구경을 했다. 한 명씩 유심히 보다 보면 시간이 쑥쑥 잘도 흘렀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승객이 있다. 다리가 불편해서 목발을 짚고 탄 엄마와 예쁜 언니, 두 모녀가 우리 옆줄에 앉았었다. 그 언니는 틈틈이 엄마의 다리를 주무르고 간식을 챙겼다. 삶은 계란을 정성스럽게 까서 엄마의 입속으로 넣는 그녀를 대놓고 빤히 바라봤나 보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예쁜 사람 보는 것을 좋아한다. ) 나에게도 계란 줄까? 먹을래?라고 물었다. 낯을 가려 대답 대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지만 색칠공부를 하면서 슬쩍슬쩍 훔쳐봤다. 그녀의 눈코 입은 흐릿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얼굴이 하얗고 손에 든 계란 모양의 미인형 얼굴이었다. 내 색칠공부 속 공주님이 튀어나와 내 옆에 앉은 기분이었다. 얼굴도 예쁜데 착하기까지 한 그 언니를 보며 아가씨가 될 내 모습을 상상했다. 


승객 관찰 다음으로 즐거웠던 일은 열차를 지나가는 간식 카트였다. 승무원이 카트를 끌며 입구에 진입할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동생에게 속닥거려서 얼른 엄마를 깨우게 했다. 그때만큼은 엄마는 별 잔소리 없이 먹고 싶은 간식을 마음껏 사주었다. 혹시나 카트가 지나가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기에 머릿속으로 무엇을 먹을지 미리 골라두었다. 최애 간식템은 후랑크소시지와 오징어포였다. 맥주 안주였기에 꽤나 짭짤했지만 짠물이 다 사라질 때까지 질겅질겅 씹는 게 재밌어서 자주 사 먹었다. 지금은 턱관절이 아파서 잘 먹을 수 없는 오징어포를 그때는 신나게 씹어댔다. 


하지만 아이와 9년 만에 탄 KTX는 그때의 무궁화호가 아니다. 매정하고 차갑다. 간식 카트는 사라진 지 오래이고 사람 구경하는 일도 재밌지 않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버즈나 에어팟을 끼고 액정만 쳐다보고 있다. 대화도 없이 조용하다. 오히려 수다스러운 우리 아이에게 내가 조용히 말하라고 주의를 줄 뿐이다. 녀석은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행 기차를 상상했나 보다. 유리창도 너무 작고 계속 깜깜한 터널만 나와서 경치 구경도 할 수 없단다. 나도 실망스러운데 넌 오죽하리. 다음번엔 KTX 대신 '남도해양열차' 표를 끊어야지. 내가 어린 시절 누렸던 느림의 미학과 낭만을 녀석과 공유하고 싶다.



-관련 그림책-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기차 여행을 떠난
톰의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기차 여행은 즐거워요』는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기차역과 기차, 그리고 기차를 타고 가는 여정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여동생 이네스와 함께 작은아버지 댁에 가기 위해 기차에 오르는 주인공 톰. 톰은 자신이 기차 탈 곳을 찾고, 기차가 움직이는 원리에 대해서도 배우며, 오빠답게 기차에서 위험하게 움직이려는 동생 이네스를 타이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나 버스로 이동할 때는 할 수 없었던 일들도 하게 됩니다. 엄마, 아빠와 마주 앉아 가고, 달리는 기차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좌석 사이 통로를 걸어 보고, 간이 탁자를 펼쳐 놓고 도시락을 먹거나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냅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는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며 또 어디로 향해 가는지 궁금해 하기도 하지요.


이렇듯 아이들에게는 기차를 타고 가는 여정 자체가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보내는 특별한 시간이며, 그 시간은 고스란히 아이들의 추억이 됩니다. 이 책을 계기로 아이들에게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못할 기차 여행의 추억을 만들어 주세요.

                                                                                       -출처 예스 24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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