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나는 기다립니다>를 읽고-
"엄마.. 보리가 죽은 것 같아. 딱딱하게 돌처럼 굳었어.."
올해 2월 아이의 등교 준비로 바쁜 아침 시간이었다.
"무슨 소리야 어제 오랜만에 집 청소해줘서 좋아했잖아. 자고 있는 거겠지."
당황한 표정을 숨기려 담담하게 보리를 만졌다.
검지 손가락 끝을 몸에 대는 순간 내 피부의 땀구멍들이 빠짐없이 닭살로 뒤덮였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느낌은 처음 받아본다. 뻣뻣해진 동물의 사체를 만지니 머리끝이 쭈뼛쭈볏해지고 토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 앞에서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잠든 게 아니네." 말을 꺼내자마자 까맣고 동그란 눈은 눈물로 가득 차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돼 꺼이꺼이 목놓아 통곡했다.
이런 기분으로 학교에 갈 수 없다는 아이를 달래서 등교시켰다. 집에 있으면 하루 종일 울 게 뻔한데 내가 지칠 것 같았다. 집에 오면 멋진 장례식을 해주자라고 약속하고 곧바로 담임선생님에게 클래스 톡을 보냈다.
"선생님, 오늘 아침 00가 키우던 햄스터가 죽고 말았어요. 아이가 울면서 갔으니 너무 놀라지 마세요."
사후 경직된 사체를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놔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만질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회용 숟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떠서 녀석의 집에 넣었다. 그리고는 좋아하던 해동지와 톱밥 베딩으로 보이지 않게 덮어주었다.
하교한 아이의 눈은 얼마나 울었는지 두배로 퉁퉁 부어있었다. 아직도 눈물이 남았는지 나를 보자마자 또 훌쩍훌쩍거렸다. 봐, 엄마가 집에 잘 넣어줬어. 나중에 아빠 퇴근하면 묻을 곳을 찾아보자.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더니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나오지 않는다. 한 시간 가량 시간이 흘렀다.
어린 시절 울 때마다 뚝 그치라고 혼이 난 적이 많기에 위로에 서투르다.
걱정이 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괜히 달래다가 역효과가 날 것 같아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좀 더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눈물로 번진 편지를 내게 보여준다. 보리에게 쓴 마지막 말들이 한가득이다. 두 바닥을 빽빽하게 채웠다.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서 똑같은 말들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해씨별에서 행복하게 살라고. 잘 지내고 있으면 우리 다시 만날 거라는. 그동안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편지를 읽으며 어느새 나도 훌쩍이고 있다. 그림책 <나는 기다립니다>를 읽으며 그 날이 떠올랐다. 책 속 소녀와 강아지의 모습이 우리집 두 남매를 떠올리게했다.
보리는 다람쥐를 닮은 햄스터였다. 산책할 때 주인과 함께 나온 강아지를 보며 아이는 계속 졸랐다. 강아지를 키우자고. 나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네 비염 때문에 키울 수 없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어느 날 시무룩한 모습이 딱했는지 신랑이 아이랑 같이 마트에 가서 보리를 데려왔다.
내 의견은 반영되지 않은 순전히 부자간의 짝짜꿍이었다. 나는 걔가 싫었다. 어린 시절 쥐덫에 걸려 죽은 쥐들을 많이 봐서 그런 걸까? 걔를 볼 때마다 그 죽은 쥐들이 떠올랐다. 아이가 만져보라고 코 앞에 불쑥 들이밀어도 싫다며 치우라고 질색했다. 쥐처럼 생겨 정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는 참 행복해했다. 그동안 금붕어, 장수풍뎅이, 자라를 키웠지만 금세 심드렁한 녀석이었다. 사랑을 못 받은 생명체들은 수명을 다 못 채우고 죽고 말았다. 그러나 보리는 달랐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는 처음이라며 곧바로 자신의 동생으로 삼았다.
보리에게 오빠라고 말하며 종알종알거렸다. 유튜브에서 수시로 영상을 검색해 꼼꼼히 햄스터에 대해 공부했다. 가장 좋아한다는 간식들과 추천 용품들을 잔뜩 사서 120리터 대형 리빙박스를 채워나갔다. 코코넛으로 만든 집, 호주산 화장실 모래, 호흡기에 좋은 고급 베딩, 3만 원이 넘는 쳇바퀴를 사서 녀석에게 선물했다. 3000원도 안 주고 데리고 온 햄스터를 위해서 아이는 자신의 용돈을 아낌없이 썼다.
안 그래도 좁은 집에 짐만 늘어난 것 같아 나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냄새도 참 고약했다. 매일 배설물을 치워주지 않으면 하루도 안돼서 방치된 동물원 냄새, 찌린내가 온 집안을 진동했다. 여름에는 반나절도 안돼서 심해졌다. 신랑은 자기가 사줬으면서 퇴근해 오면 악취가 난다고 짜증을 부렸다. '아 이걸 죽여 살려?' 어이가 없지만 속으로 온갖 욕을 해대며 화를 삭혔다.
나는 사랑 대신 집 청소와 물 주기를 도맡아 하며 보리를 반쯤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렀고 어느 순간 할머니가 된 녀석은 뒷다리를 쓰지 못했다. 햄스터의 수명은 2년이었다. 죽음이 임박해오고 있었다. 뒷다리를 질질 끌며 간식을 받아먹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서글펐다. 늙으면 힘든 건 손바닥보다 작은 너도 매한가지구나.
퇴근하고 온 남편은 삽을 찾아와서 아이와 함께 아파트 화단으로 내려갔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불법으로 보리의 관(녀석의 코코넛 집)을 편지와 함께 묻었다. 나중에 못 찾으면 안 되기에 사진도 찍었다. 그날부터 매일 아침 등굣길에 아이는 무덤을 찾아간다. 길고양이가 혹시나 파헤쳤을까 봐 전전긍긍이다.
2년 동안 무한애정을 받다 떠났으니 보리의 마지막은 편안했을 것이다. 책을 읽다가 죽음에 대한 내용이 나오면 눈물짓던 아이가 이제는 담담해졌다. 어쩐지 녀석의 눈동자가 한층 깊어 보인다. 죽음이란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게 된 걸까?
-관련 그림책-
한 소녀가 애견샵을 찾았습니다. 까만 털을 가진 작고 복슬복슬한 강아지와 소녀의 첫 만남이었지요. 귀여운 강아지에게 한눈에 마음을 빼앗긴 소녀는 강아지를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소녀는 강아지와 함께 공놀이를 하고, 운동을 하고, 낮잠도 자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지요. 하지만 소녀는 점점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딪혔습니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강아지가 어질러놓은 집, 피곤한데 산책을 가자고 보채는 강아지, 주변 이웃들의 시끄럽다는 항의까지 처음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자꾸만 벌어집니다. 한참 고민을 하던 소녀는 어느 날 강아지와 같이 여름휴가를 떠나게 됩니다.
이 책은 갈수록 늘어가는 반려동물과 그 숫자만큼 늘어가는 유기 동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평범한 소녀와 강아지 이야기를 통해 반려동물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귀여운 동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것이며 이는 곧 책임을 진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반려동물과 사진 찍고, 놀고 자랑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혹시 아프지는 않은지, 밥은 잘 먹는지, 심심해하진 않는지, 매 순간 확인하고 자신을 희생하기도 하며, 사랑으로 보살펴 주어야 하는 가족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이 책은 글 작가가 다비드 칼리의 동명의 그림책 『나는 기다립니다』를 오마주하여 반려동물에 대해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질문을 던져줍니다. 여기에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그림책 시리즈를 그려 낸 잠산 작가의 환상적인 그림이 어우러져 한층 감동을 더했습니다.
-출처 예스 24 책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