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아이의 열 번째 생일날이 다가온다. 생일 때마다 통도환타지아 또는 경주월드 등 놀이공원에 갔었는데 이번에는 태어난 지 십 년, 색다른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보물 우리 사랑이(배 속에 있을 때 태명이다)에게 힘들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기억을 가능한 한 많이많이 만들어 주고 싶은 게 엄마로서의 바람이다. 며칠을 고민하다 대학교 시절 친구와 같이 간 장소가 떠올랐다. 그림책 『월든』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 호수 근처에 집을 짓고 숲속 생활을 통해 자신을 다독이고 치유한다. 매일 아침 일어나 호수에서 목욕하고 새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여유로움을 만끽한다. 나한테는 대학 시절 추억의 장소가 그런 곳이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과외와 편의점 일까지 세~네 개의 알바를 하며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모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런 빡빡한 일상의 나에게 쉼표를 찍어주는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항상 계획을 다 세워서 순천, 제주도, 소매물도 등 전국으로 나를 데리고 다녔다. 매번 친구가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는 기분이라 ‘영남알프스’ 당일치기 코스는 나한테 맡기라며 기세등등하게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20년 전에는 지금처럼 유튜브, 블로그 등 콘텐츠가 별로 없었는지라 계획한 코스는 무모했다. 취서산, 신불산, 간월산 능선까지 산 세 곳을 왕복 네 시간 만에 넘는 일정은 등산을 거의 해본 적이 없는 ‘등린이’들에게 무리였다. 친구도 이 산들을 하루만에 다 넘을 수 있을까? 걱정은 했지만 나는 할 수 있다며 허세를 부렸다. 결국 아침 아홉 시에 출발해 해가 다 지고 깜깜해지는 저녁 여섯 시가 넘어서야 하산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적막한 산은 어둠 속에서 공포 영화 《13일의 금요일》의 살인마 제이슨이 튀어나올 분위기였다. 핸드폰 손전등 기능을 켜서 나를 안심시키는 씩씩한 친구에게 이러다가 조난당하는 것 아니냐며 울먹였다. 다행히 야간산행을 하시는 분들이 여럿 있었고 그분들의 안내를 받으며 네발로 기어 내려왔다. 손톱에는 새까맣게 흙이 끼고 눈은 울어서 퉁퉁 부은 몰꼴이라니^^:: 하지만 그때 친구와 같이 본 간월재 억새 군락지는 평생 잊을 수 없다. 세 시간을 걸어서 도착해 눈 앞에 펼쳐진,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억새의 황금물결은 살아가며 힘이 들 때 꺼내놓는 나의 월든 호수이다.
그런 기억을 아이의 열 번째 생일선물로 주고 싶었다. 이제는 유튜브, 네이버 등 해당 장소만 입력하면 상세히 다 나온다. 예전처럼 무리한 코스를 잡으면 안 되기에 조사를 꼼꼼하게 했다. 그리곤 유모차, 멍뭉이, 임산부, 다섯 살짜리 아이도 간다는 가장 쉬운 코스를 선택했다. 왕복 12km지만 오르막 내리막이 거의 없는 코스였다. 시작부터 파란 하늘 아래에 단풍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한 가을 산의 정경은 쉴새 없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을 정도로 환상이었다. 아이도 엄마 너무 예쁘다며 소리를 지르고 감탄했다. 행복했다. 이번에는 완벽한 계획이라고 성급히 결론 내리며 ISTJ 형 엄마는 뿌듯했다.
하지만 출발 후 30분도 채 안 되어 아이는 다리 아프고 힘들다며 오만가지 인상을 쓰고 짜증을 냈다. 힘을 내서 걸어가다 보면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림이 기다리고 있다며 살살 달랬지만 짜증을 내는 빈도는 점점 잦아졌다. 결국은 간월재 억새 군락지까지 절반 정도 남았을 때부터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다리 아프니 더는 못 걷겠다고, 돌아가자고 징징거리니 달래다가 지친 나는 폭발했다. 우는 아이를 너 알아서 해!라며 버럭하고 냉정한 우리 부부는 갈 길을 갔다. 아이도 어쩔 수 없으니 울면서 따라왔고 결국 두 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하면 뭐하나…. 이미 서로 감정은 상할 데로 상해있었고 아이는 억새를 보고도 시큰둥했다. 포토 스팟에서 사진을 찍자니 입이 삐죽 나와서 마지못해 포즈를 취하는 아들이 야속했다. “00야,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도착하니 어때? 멋지지?”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며 아이의 느낌을 물어본다. 돌아오는 짧은 한마디, “안 멋져. 이게 뭐야? 시시해. 배고파서 짜증나.” 아~~얄미운 녀석!
그날 밤 나는 또 반성 일기를 썼다. 잊을 수 없는 선물은커녕 오로지 내 멋대로 생각한 계획이었구나 라는 그런 내용이다. 간월재 휴게소에서 컵라면을 먹고 나서야 아이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다행히 돌아가는 6킬로미터는 올 때보다 짜증을 덜 냈다. 포기하지 않고 따라와 준 것만으로도 기특하고 고맙기는 하다.
지금 이 글을 쓰며 아이에게 다시 물어보니 똑같이 대답한다. 다리만 아프고 힘들기만 했다고. 예쁜 추억 대신 괴로웠던 기억을 만들어 줬다. 왕복 12킬로미터 등산은 운동을 싫어하는 열 살 어린이에게 무리였다. 사람들에게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 엄마가 욕심이 과했다고 나무란다. 그래도 십 년 뒤 내가 50, 아들이 첫 스무 살을 맞이하는 날에, 그때 다시 와서 아이에게 묻고 싶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감동적인지, 여전히 별로인지. 포기를 모르는 집착 끝판왕 엄마이다. 가기 싫다고 한다면 너만의 ‘월든 호수’를 발견했을 때 나를 데리고 가달라고 졸라야겠다. 그곳이 어디일까 벌써부터 궁금하다.
-관련 그림책-
미국의 철학자이자 동식물 연구가 겸 수필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소박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문명사회를 등진 채 월든 호숫가 숲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혼자 살며 그때의 경험과 깨달음을 『월든』에 담았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느끼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발견하는 과정이 그려낸 그의 대표작 『월든』은 19세기 가장 중요한 책 가운데 하나로 평가를 받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상가와 문학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월든』에서 뽑은 글을 소로가 숲에서 생활을 시작한 봄부터 이듬해 봄까지 계절의 흐름에 따라 재구성하고 여기에 영감을 얻은 그림과 함께 담아낸 그림책입니다. 소로의 명문장들에 안데르센 상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아름다운 수채화가 어우러진 그림책 『월든 _ 숲에서의 일 년』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모두의 가슴을 울리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줄 것입니다.
-출처 예스24 책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