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매거진을 연재 브런치북으로 옮기느라, 오늘의 포스팅은 기존에 올렸던 글과 동일하게 작성되었습니다. 차주부터는 새로운 글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2014년 4월)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내리니 밤 9시였다. 여행 시작의 기쁨도 잠시, 긴장감이 밀려왔다. 인생 처음으로 혼자 유럽에 온 것인데, 2달 반동안 홀로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했다. 교통편, 숙소예약, 각종 임기응변 상황까지. 우선 예약해 둔 한인민박에 파리 도착을 알리고, 공항에서 파리 지하철 노선도 가장 마지막 역까지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당혹스러운 광경이 펼쳐진다. 그라피티로 가득한 담벼락과 허름한 옷차림으로 몰려다니는 청소년들까지. 버스 정류장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민박집에서 알려준 대로 전화를 거니, 한 사람이 와서 인사를 했다. 그런데 놀란 것은 분명 한인민박이었는데 말투가 조선족이었다.
어버버거리며 그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데 숙소로 가는 도중에도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들이 즐비했다. 그때 민박 주인이 말을 걸었다.
"쟤들 불쌍한 애들이에요."
"네?"
"부모님이 없거나 돈이 없죠. 그래서 제가 가끔 담배도 공짜로 주고 그럽니다."
"아... 네. 마리화나는 아니죠?"
"지금 피우는 건 마리화나일걸요?"
나는 문화충격으로 말없이 한인민박 주인에게 더 바짝 붙어서 걸었다. 어느새 도착한 민박집은 의외로 괜찮았다. 2층 주택이었는데 담장도 높고 출입문은 전자식 보안장치가 되어있었다.
들어가서 안내해 주는 2층침대에 짐을 푸니 밤 10시가 넘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한 한인민박의 이미지는, 한국 여행자들이 북적거리면서 술도 마시고 서로 여행을 온 이유라든지 물어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민박집은 조용했고 한적했다.
4월이라 여행 비수기겠지 싶으면서도 민박집 사장님께 사람들은 어디 갔냐고 물어보니 바또무슈(센 강 유람선)를 타러 나갔단다. 라면이라도 하나 먹고 자라고 권하셨지만 첫 장거리 비행에 한숨도 못 잔 상태라 빠른 시차적응을 위해 밤 11시쯤 잠을 청했다.
아침 7시쯤 눈이 떠져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다른 침대 몇 곳에도 인기척이 있었다. 사람들이 깨기 전에 얼른 씻고는 1층 주방으로 내려갔다. 민박집 사장님이 요리를 하다 말고 벌써 깼느냐며 아침인사를 하셨다. 그러더니 내가 이곳을 9박 10일 예약했으니 유람선 티켓(당시 10유로 상당 가격)을 공짜로 주겠다고 하셔서, 감사인사를 하고 사람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아침 식사 시간이 되어 드디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러나 식사가 시작되었는데도, 내 생각과 달리 서로 경계하는 분위기로 조용한 식사 시간이 지나갔다. 보다 못해 내가 먼저 스몰토킹을 시작하니, 너 나 할 것 없이 이야기꽃이 피기 시작했다.그렇게 타인의 여행 일정에 끼기도 하며 며칠이 지났는데, 좋은 풍경과 달리 나는 마음이 착잡해지기 시작했다.
첫 여행이었어서 그런지 3박 4일 만에 파리를 다 둘러봤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다. 루브르, 에펠탑, 베르사유 등등.
내 파리 일정은 아직 6일이나 남았었는데 스테이케이션은 무슨, 우울해질 정도로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5일째에는 아침식사 후 숙소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때, 한인민박 주인아저씨가 숙소로 올라와서 장 보는 데 따라가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셨다. 며칠 새, 어색함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고 딱히 할 것도 없었던 나는 어딘지도 모르고 흔쾌히 따라나섰다.
재래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고 생선부터 소시지까지 음식재료들이 널려있었다. 아저씨는 좋아하는 중국요릿집으로 가서 우육면과 맥주를 사주셨다. 그리고는 밥을 사주었으니 장바구니를 숙소까지 들어달라고 하셨다. 나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다.
이 주인아저씨는 일꾼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멀리까지 어렵게 여행을 와서 가만히 숙소에 누워있는 스물여섯 살짜리 학생이 안쓰러웠던 것이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처럼 따뜻하게 챙겨주시는 모습에 맥주를 한잔 하며 나도 마음을 열었고, 조선족인 아저씨가 왜 파리에 한인민박을 열게 되었는지 영화 한 편 뺨치는 스토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숙소에 돌아와 잠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저녁시간이 되어 다시 투숙객들이 모여들었고, 결국 이 날은 제대로 된 관광지를 한 곳도 가지 않은 하루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관광지가 아닌 곳을 다녀오고 나니, 오히려 이때부터 나는 제대로 여행을 다시 즐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