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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an 25. 2023

트로트와 글쓰기가 무슨 상관

미쳐야 미친다

요즘 트로트 경연 시청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몇 년 전에 누가 트로트 방송 이야기를 했지만 흘려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시청하게 되면서 몇몇 가수의 이력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노래를 들으며 재미를 붙였다. 요즘엔 맞불을 놓은 듯 진행되는 두 군데 방송을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처음 트로트 경연을 시청했던 3년 전은 코로나 감염병 유행이 막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가히 국민적 열풍이 불었다고 할까, 엄청난 관심 속에 경연이 진행되었다. 후반부에 팬데믹으로 방송 유형이 달라져도 그 열정은 식지 않았고, 코로나로 인한 우울증을 트로트가 치유했다고 공공연히 떠들어댔다. 그만큼 트로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나까지 합세해 트로트를 듣고 방송을 시청했으니 말이다. 


그전까지 트로트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전혀 부르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나, 일부러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가곡을 배우기 위해 노력한 것과 대조적이다. 피아노가 집에 없었을 때에는 하모니카로 음을 잡아가며 가곡을 배웠다. 그러다 테이프나 시디를 통해 배웠고, 그전에는 방송국 음악 프로그램에 신청해서 들었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가곡은 대충이라도 부를 줄 알게 되었다. 그것으로 가곡을 비롯하여 노래에 대한 관심도 끝이었다. 노래를 좋아했는데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차츰 그 세계에 심취하게 되었고, 더 경건하기 위해 성가만 부르는 편협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가곡이든 클래식이든 건전가요든 사람의 정서와 세상적인 즐거움을 위한 노래를 멀리했다. 한동안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은지 실소가 나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순수함이, 정갈함이, 이해되기도 한다. 사람이 다 같은 건 아니니까, 나를 내가 이해해주지 않으면 누가 이해하랴 싶으니까, 그 모습 그대로 나를 이해했다. 


따지고 보면 유학의 경전 중 하나인 『시경』도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들을 모아 놓은 게 아닌가 말이다. 그 노래집을 공자님이 정리했다는 것도, 아들에게 권했다는 것도, 흥미롭지 않은가. 내가 『시경』을 배우며 처음 들었던 느낌은 유치함이었다. 또 감정이 너무 적나라해서 놀랐다. 낯 뜨거운 장면도 있었다. 이미지, 비유, 아이러니와 역설, 상징 등을 활용해 함축과 응축에 의한 압축된 형태로 시를 짓는 현대시 창작방법과 달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 그 솔직함과 순수함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트로트도 그랬다. 내가 트로트를 잘 부르지 않고 배우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시경’을 대했을 때 느낌과 유사한 것이었다. 왜 저렇게 고아하지 못하게 감정을 노출할까. 어떻게 저런 어휘를 입 밖에 낸단 말인가. 낯 뜨거웠다. 한 예로 “아주 그냥 죽여줘요” 이런 가사를 어떻게 노래할 수 있는 걸까 말이다. 그것도 온 힘을 다해 부르다니. 대중가요 가사를 내가 써야 한다고 얼마나 읊조리며 무시했던가. 


그런데 이제 그런 가사들이 마음에 와닿는다. 이 무슨 파란일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절실함과 구구절절함이 내 속을 파고들며 눈물 나게 한다. 감정이입은 물론이거니와 꼭 그 노래의 화자가 나인 것처럼 생각되어 감동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어느새 눈물이 괴기도 한다. 트로트 가사를 쓴 창작자에게 시인이라 칭하는 데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트로트 가수 역시 성악가와 같은 선상에 놓는 것도.


트로트가 이해되어야 비로소 인생을 알게 되는 거라던 누군가의 말에, 깊이 고개를 끄덕인다. 공자님도 아들에게 『시경』을 배우지 않으면 말할 수 없고, 담벼락을 마주 대하고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시경』은 당대의 트로트다. 마찬가지로 트로트를 모르면 사람과 소통할 수 없고, 답답하다는 뜻이지 않을까.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리라. 나도 이제야 비로소 인생을 이해하기 시작한 늦둥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요즘에 트로트 듣는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 가수가 곡 해석 능력과 감정을 목소리를 통해 완벽하게 노래할 때, 그 느낌이 내 감정 깊은 곳으로 흡입되어 전율이 인다. 아, 나도 저런 글을 쓰고 싶다. 저렇게 부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저렇게 유연하고 강약 완급 조절이 잘된 노래를 진성과 두성을 통해 내기 위해 얼마나 고뇌했을까. 아, 나도 저런 글을 쓰고 싶다, 간절히. 가수의 그 노력과 고뇌가 전이되어 내 감정을 흔든다. 눈물이 흐른다. 귀가 열리니 감동하게 된다. 


트로트를 들으며 나는 글쓰기를 생각한다. 가수 한 사람마다 부르는 노래가 한 편의 글로 인식된다. 저 가수는 저런 류의 글을 쓰고 있고, 이 가수는 이런 류의 글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아, 저 부분을 그렇게 쓰는 것보다 이렇게 쓰는 게 나을 텐데, 중얼중얼 훈수를 둔다. 그러다 어이없어 실실 웃는다. 내가 드디어 미치기 시작한 걸까 싶어서다. 미쳐야 미치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어젯밤 늦도록 트로트 경연 방송을 보았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자리에 눕지 않고. 감동하다 아쉬워하며 흐뭇해했다. 공연히 훈수도 두면서. 오늘만 지나면 내일 밤에 다른 방송국의 트로트 경연이 또 방송된다. 기대된다. 노래로 글을 쓰는 가수들을 보며, 나는 감동하고 반성하며, 아쉬워할 것이다. 좋은 글을 읽으며 감동하고, 그렇지 못한 내 글을 반성하듯이. 두 방송의 구성과 진행방법 등을 비교하며, 내 글의 구성과 서술방식 등도 냉철하게 분석하리라. 우습지 않은가, 트로트와 글쓰기가 무슨 상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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