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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ul 18. 2023

개미지옥 같은 글 감옥

그래도 놓지 못하는 것

  

오늘은 쉬려고 했다. 아직도 일하지 않을 때는 손에 부목을 대고 있다. 매일 날 것 같은 글을 꼭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강요한 적 없고, 안 쓴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순전히 자기만족이다. 이렇게 이만큼 해왔다는. 그건 유치함을 내포하고 있다. 내 생각이다. 굳이 완성도 떨어지는 날것을 생산해 낼 필요도 없다. 그래서 쉬려고 했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벌써 오후, 그것도 다 저녁이다. 장맛비가 멈추고 모처럼 해가 반짝 났다. 서쪽 창 쪽으로 옮긴 서재에서 컴퓨터를 열었다. 저녁 해가 창으로 들어온다. 눈부시다. 눈이 부시지 않도록 각도를 조절해 앉는다. 하늘이 보인다. 새털구름. 옆에 약간 먹구름. 어서 몇 자라도 쓰고 저녁 산책을 나서리라. 벽(癖)이다. 이 벽 때문에 이만큼 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 벽을 따라 사는 게 마음 편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제대로 사람 되기 틀렸다. 기필할 것이 없어야 하는데, 이렇게 꼭 해야 되는 게 있으니까. 그래야 마음이 편하니까. 그것이 비록 자기만족이라 할지라도. 그러니 소인 아닌가. 인정하자. 난 요만큼의 사람이라고. 제대로 사람이 되고 싶어 노력한 것 같지만 그것 역시 제대로 한 게 아닌 듯하다. 이렇게 넋두리 내지 헛소리를 지껄이며 글이랍시고 쓰고 있으니, 우습지 않은가. 


그래도 놓지 못하겠다. 글쓰기를. 뭐라도 써야 마음이 편하다. 습관이 된 것 같다. 딴은 다행이다. 평생 쓸 거라고 다짐했으니까. 어떤 이는 말한다. 이제 글이 징그럽다고. 쓰는 게 지겹다고. 그날이 그날이고 그 얘기가 그 얘기인데, 뭐 하러 허구한 날 쓰겠느냐고. 이제 쓰지 않겠다고. 그렇게 야멸차게 끊어버릴 날이 내게도 올까. 어떤 이는 그 잘 쓰던 소설을 쓰지 않는다. 이유는 소설을 쓸 필요가 없어져서라고. 신에게 기도하면 되므로. 그 작가는 종교생활에 열중하게 되면서 소설 쓰기를 놓았단다. 그렇더라도 나는 놓지 못하겠다, 아직은. 


오늘 강의 시간에 말했다. 글쓰기는 노후대책 중의 하나라고. 노후를 어떻게 보낼까 걱정하는 이들이여, 글쓰기에 관심 갖기를. 글을 쓰면 사유한 것들이 정돈되고 구체화된다. 그것이 언어로 체계화 또는 형상화되어 문장으로 나타난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뇌를 늙지 않게 하고, 활성화시켜 정신이 젊어진다. 맞을 것 같다. 글 쓰려고 생각하다가 더 늙고 스트레스받는다는 이도 있지만 그건 투정일지 모른다. 


이번에 살림을 다시 정리 정돈하면서 오래전에 쓴 일기를 보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쓴 거다. 이상한 일이었다. 중3 어느 날에 쓴 일기를 읽는데, 그날의 기억이 오르르 되살아나는 게 아닌가. 소름 돋았다. 내 기억 창고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그것을 여는 순간, 다시 재현되다니.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날의 일만 그랬다. 웃다가, 미소 짓다가, 울었다. 사춘기 소녀의 감성과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가는 내가 대견하고 가엾었다. 열여섯 살 소녀가 되어보는 호사를 누리다니, 그건 감격적이기도 했다. 


나는 반세기를 넘어 과거에서 현재로 와 있었다. 글쓰기가 아니었다면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기억 속에 있는 것과 문자로 기록돼 있는 것은 차이가 있다. 기억은 왜곡될 수 있으나 기록은 그렇지 않다. 그 기록에서 과거의 나를 통해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불가능한 때에도 꿈을 꾸었고, 그 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꿈이 중요한 것이리라. 불가능한 현실에서 그것을 놓지 않다니. 내가 나를 꼭 안아주었다. 글로 기록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감격은 없었으리라. 


오늘은 쓰지 않고 쉴 생각이었는데, 다 저녁에 쓰고 있다. 부목을 잠시 풀고, 아픈 손목과 손가락으로 자판을 치고 있다.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고 약속. 꼭 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글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써야 더 마음이 편하다. 그저 낙서 같은 글이라 할지라도 몇 자 끼적여 보는 게 낫다. 세상에 재미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이 개미지옥 같은 글 감옥에 갇혔는지. 황홀한 글 감옥에서 탈출할 생각은 없다. 


해가 넘어갔다. 곧 어둠이 몰려오리라. 이제 저녁 산책에 나서야겠다. 물오리가 나왔을까. 왜가리는. 또 피라미들은. 얼른 나가면 피라미가 뛰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마음이 가볍다. 이렇게 낙서 같은 글이라도 한 편 지었기 때문이다. 발걸음도 가벼울 것 같다.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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