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경제권

by 최명숙

어느 집이나 아내가 경제권을 갖는 게 보통이다. 우리는 모자(母子)이기 때문에 일정액수의 생활비만 받기로 했다. 월 삼십만 원, 그게 공식적으로 합의한 생활비다. 안방 내주고, 빨래, 청소, 세끼 식사까지 제공하고 받는 생활비로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다. 하지만 자식인데 어쩌랴. 엊그제 아들이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이제부터 본인의 경제권을 모두 맡기겠다며.


애초부터, 아니 꿈에도, 뉘 집처럼 나도 아들의 카드를 벅벅 긁어댈 날이 오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언감생심. 펑크 나는 카드 값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어차피 잔고가 없는 통장이니 인심이라도 쓰려고 그러는 것 아닐까. 잠시인데 수십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래 봬도 내 머리가 보통은 넘지 않는가. 대뜸 냉큼 받을 내가 아니다. 일단 야리는 눈으로 째려보았다. 카드에 넘어갈 나인가.


한참 째려보기만 하고 받지 않자 그도 말이 없다. 건넨 손을 들이밀지도 채근하지도 않았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성질 급한 내가 물을 수밖에. “뭐야? 어쩌라고.” 못마땅한 말투가 저절로 나왔다. “제 통장 엄마가 관리해 주세요. 이제 카드 안 쓰려고요. 잘라버리시든 어디 두시든 알아서 하세요. 이제부터 들어오는 수입은 모두 엄마 통장으로 입금할게요. 저는 필요하다고 할 때 보내주세요. 체크카드만 쓰려고요.” 아들의 말은 단호했다.


대충 알겠다. 아들의 통장은 바닥일 거다. 안 봐도 비디오다. 전시회 끝나고 몇 달째 일주일에 네 시간 강의만 하는데, 무슨 재주로 살아간단 말인가. 물론 모 영화사와 계약해서 하는 일이 있긴 한데, 개런티가 아직 나오지 않아 전전긍긍하는 것 같은데. 깡통인 통장을 주고 선심 쓰는 거라면, 낚일 수 없다. 결단코. “너, 어디서 약을 팔아! 내가 누군 줄 알고!” 소리쳤다. “약을 팔다니요. 제가 약장수인가요? 참나!” 어이없다는 말투다. 말이야, 약장수 저리 가라는 아들 아닌가. 하긴 그도 지금까지 말로 벌어먹고 살았으니.


하지만 나를 능가할 순 없다. 속내가 뻔한 것 아닌가. 통장에 잔고가 넉넉하다면 카드를 맡길 리 없다. “그럼 왜 뜬금없이 카드를 맡겨? 내가 네 마누라라도 되니? 왜 네 경제권을 내게 넘기느냐고. 불순한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잖아!” 아들은 절대 그런 게 아니라며 여전히 카드를 내밀었다. 할 수 없이 받았다. 통장에 잔고가 얼마나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못 물었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아직 최소한의 하숙비 월 삼십만 원이 들어오는지 어쩌는지도 확인하지 못한 나다. 그만큼 아들의 수입이 눈에 보이는데, 아무리 안 써도 고정적으로 나가는 게 있기에, 아무 말하지 않고 있는 참이다. 저 민망하고 나 민망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 이런 어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일 천하태평인 아들이다. 애써 확인할 필요 없음, 이게 솔직한 내 마음이다. 언제든 말을 하겠지 싶어 잠잠히 있었다. 몸에서 하루에도 몇 개의 사리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참으며.


아들이 고백했다. 통장에 잔고가 없단다. 이제부터 수입 관리를 맡아달란다. 참나, 맡고 자시고 할 게 뭐란 말인가. 한 푼도 없는데. 앞으로 수입이 꾸준히 들어올 건데, 그걸 관리해 달라는 것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대동강 물 팔아먹은 봉이 김 선달도 아니고, 무슨 재주로 수입이 들어온단 말인가. 헛웃음을 참고 계획을 말하라고 했다. 수입이 들어온다는 걸 어떻게 보장하느냐고, 그것도 설명하라고. 말로야 뭐든 못하랴. 더구나 변호사 뺨치게 말 잘하는 그가 아닌가. 아들이 계획을 줄줄줄 엮어댔다. 각오가 대단한 듯했다.


엮인 거라고 해도 할 수 없고, 속아 넘어간 거라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자식의 일이니까. 하지만 믿어보기로 했다. 아주 헛소리는 아니니까. 현재 영화사로부터 받은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 지금을 원점으로 생각하고 경제 관리를 새롭게 하고 싶은데, 그걸 맡아달라는 것이니, 어미가 어찌 외면하랴. 앞으로 일에만 집중하고 싶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내가 네 참모냐, 매니저냐, 마누라냐, 소리를 쳤지만 응하고 말았다.


카드를 가위로 잘라버릴까 생각했다. 주춤했다. 앞으로 카드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깊숙이 잘 넣어두었다. 각오가 그렇다면 지켜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집 나가 살던 십 년이 문제였던 것 같다. 수입이 적었던 것도 아닌데, 그것을 제대로 야무지게 관리하지 못해, 잔고가 빈 것 아닌가 말이다. 마흔두 살, 이 나이에 새롭게 시작을 한다니 기가 막히긴 해도,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므로, 결국 응원의 말을 건넸다. 믿을 테니 잘해보라고.


아들이 말했다. 지금 통장이 빈 것은 오늘까지 들어온 모든 수입을 내 통장으로 보냈기 때문이란다. 통장을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확인했다. 깜짝 놀랐다. 하숙비의 열 배가 넘는 액수가 들어와 있었다. “이제 들어오는 대로 다 드릴 테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세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가 계셔서 든든하고 행복해요.” 아들의 말에, 어디서 약을 파느냐는 말은 더 이상 못했다. 뜬금없이 사랑고백을 왜 하느냐고 하는데, 자꾸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래도 한마디 했다. 너는 가끔 나를 마누라로 착각하는 것 같다고. 밥 해줘, 세탁해 줘, 청소해 줘, 그러니까 이젠 돈 관리도 해달라고 맡기는 거냐고.


이제 일 년 간 하숙비 면제다. 속으로 생각했다. 들어오는 걸 잘 관리했다가 아들이 결혼할 때 넘겨주리라. 그게 얼마나 될지 몰라도. 그 후에는 진짜 아내에게 맡기라고. 그럴 날이 빨리 도래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keyword
이전 12화아들은 결혼기피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