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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mm May 18. 2024

5성급 호텔로 변신한 나의 모교

8년 만에 찾은 스위스 대학교

환승의 끝에서 만난 로잔


그랜드 투어 여행 21일 차, 우리는 오스트리아를 떠나 스위스로 출발했다. 스위스 첫 행선지는 내가 다녔던 대학교가 있는 로잔이다. 총 513.4km 이동을 위해 아침 일찍 움직여야 했다. 직항 편이 없어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 일정이었다. 할슈타트에서 차 타고 3시간이 걸려 인스브루크로 갔다. 알프스 산이 보이는 타운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여정을 시작했다. 스위스 취리히까지 가는 구간이 공사 중인 관계로 기차 - 버스 - 기차 코스로 두 번 환승해야 했다.


취리히에서 저녁을 간단히 해결하고 마지막 2시간 기차여행만이 남았었다. 목적지까지 한 시간즈음 남았을 때 독일어로 나오는 안내 방송에서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하는 중 승무원이 나타나 자초지종 설명을 하며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우리 앞에 가던 기차가 탈선을 해서 노선이 변경되었다는 뉴스. ‘뭐라고? 탈선을 했다고?’ 엄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침엔 공사, 저녁엔 탈선이라니 당혹스러웠다. 그렇게 방향을 바꿔 도착한 비엘이라는 역에 내려야 했다. 그곳에서 베른까지, 베른에서 로잔까지 추가 환승 복이 터져버렸다.


아침 8시 반에 출발해 숙소까지 장장 14시간 반이 걸렸다. 졸업 후 처음 찾은 로잔에 내려 비몽사몽 한 채로 반가움과  탄식이 동시에 새어 나왔다. 갈아타는데만 몇 시간 걸린 대장정을 마치니 녹초보다 바스러진 기분이었다. 키르기스스탄 오쉬에서 비엔나로 가던 날이 생각났다. 비엔나에서는 도착한 날 먹은 슈바인학센이 위로가 되었는데 로잔은 추억 보따리를 선물해 줄 것이라 기대하며 잠에 들었다.


할슈타트 8:30AM - 로잔 11PM




20대 추억이 가득한 로잔 시내


추억 여행을 시작하는 설렘으로 하룻밤새 여독이 풀린 것 같았다. 화창한 날씨가 ‘어서 와! 보고 싶었어’ 외치는 것 같아 신나는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숙소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내린 순간부터 구석구석 반갑지 않은 곳이 없었다. EU 지역의 심카드 사용이 되지 않아 스위스 심카드를 사러 핸드폰 매장으로 갔다. 2011년 대학교 입학을 하고 심카드를 사러 갔던 바로 그 매장이었다. 여전히 여기 있었구나! 안팎으로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모습을 보니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이 반가웠다.


언덕길을 넘어 점심 먹으러 가는 거리에 동생과 내가 로잔에서 처음 간 식당을 봤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동생과 함께 처음 방문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당시 나는 호텔 경영인이 되는 꿈을 갖고 호텔 경영 대학교에 지원했었다.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우리는 면접을 위해 스위스 여행을 하게 되었다. 면접을 마치고 동생에게 신나서 이야기해 준 그날의 경험은 정말 특별했다.


우리 학교는 서류 합격한 지원학생들을 캠퍼스로 불러 하루 종일 면접을 진행했다. 컴퓨터로 하는 짧은 테스트부터 역할극에 심층 면접까지 다양한 일정이 있었다. 재학 중인 학생 한 명이 각자 4-5명의 지원자를 담당해 학교 투어를 시켜주고 지원학생들의 일정을 인솔했다. 대기 시간 동안 선배가 될지 모르는 재학생에게 학교 생활에 대해 직접 물어볼 기회도 있었다. 종일 함께 한 친구들과도 금세 친해져 수다를 떨다 보니 면접 보는 긴장감을 느낄 틈이 없었다.


역할극에서는 호텔에서 흔히 일어나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지원자들의 위기 대처 능력을 시험했다. 나의 상황은 고객의 컴플레인을 대처하는 매니저 역할이었다. 얼마나 엉망으로 했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감 하나는 넘치게 연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심층 면접은 한 시간 정도 진행됐다. 교수와 재학생 한 명이 지원자를 2:1로 면접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심문보다는 진솔한 질의응답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눈빛에서 나를 탈락시킬지 말지 정하고자 하는 것보다 나라는 사람을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면접을 본 지 한참 지난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면접 경험이었다. 앞으로 함께하게 될지 모르는 어린 학생들을 귀중한 손님 모시듯 한 우리 학교가 좋았다. 결과는 나오기 전이었지만 붙을 거라는 자신이 있어 가슴이 벅찼던 날. 내가 4년을 보내게 될 멋진 학교의 첫인상에 대해 동생에게 신이 나서 얘기를 했던 곳이 바로 이 식당이다. 그때와는 다른 식당으로 바뀌었지만 나의 강렬했던 추억은 13년이 지나서도 생생히 그 자리에 살아있었다.


로잔 시내 :)




5성급 호텔이 된 나의 대학교


시내에서 오후를 보내고 저녁에는 외곽에 위치한 학교로 향했다. 전에 타고 다녔던 메트로를 타고 종점으로 갔다. 마지막 정류장에 내려 버스를 찾는데 놀랍게도 항상 타던 버스가 없었다. 알고 보니 내가 졸업하고 캠퍼스를 확장해서 버스역 위치가 바뀌게 된 것이었다. 버스는 익숙한 길을 지나다가 어느 순간 새로운 길로 가기 시작했다.


내가 다닐 때는 허허벌판이었던 도로변에 내려 두리번거리니 건너편에 학교 입구가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캠퍼스와 많이 달라진 모습에 어색했다. 입구로 들어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내가 다닐 때도 있던 테라스가 보였고 낯설던 학교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8년 만에 돌아온 나의 학교! 몸집은 많이 커졌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못 와볼 줄 몰랐는데 다시 오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반가움에 몸이 붕 뜨는 것만 같았다.


내가 왔다, 8년 만에!


3면이 통유리창으로 된 입구는 휴양지 리조트 호텔을 연상시켰다. 내부로 들어오니 수백 명은 들어갈 것 같은 넓은 로비가 있었다. 왼편에는 조리 실습 공간이 보였다. 매끈거리는 메탈 조리대에 먼지 한 올 없이 깨끗한 키친은 다시 1학년이 되어 요리 수업을 하고 싶게 멋져 보였다. 로비 오른쪽에는 유리창 너머 지하로 이어지는 농구코트가 보였다. 오픈한 지 며칠 안된 것처럼 반짝이는 나무 바닥을 누비며 게임하는 학생들은 청춘 드라마 주인공이 따로 없었다.


복도를 따라 들어가 보니 수영장 표시가 있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탈의실을 지나 들어가 봤다. 올림픽 나갈 선수를 뽑듯 진지하게 수업하는 학생들, 투명한 유리 밖에 보이는 푸르른 잔디 전망까지 여긴 5성급 호텔이지 학교가 아닌 것 같았다. 새로 지어진 건물을 탐험할수록 재입학의 꿈이 계속해서 부풀어 올랐다. 10년 늦게 태어나 지금 입학했다면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행복에 겨웠다.


학교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 예약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학교 투어를 서둘러야 했다. 얼른 구옥으로 발길을 옮겼다. 드디어 내가 아는 세상이 나타났다. 화려하게 태어난 신옥과는 다르게 이곳의 시간은 멈춰있는 듯했다. 쉬는 시간마다 찾던 매점,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던 푸드코트, 모든 게 그대로였다. 푸드코트를 가득 채운 학생들을 보며 친구들이, 그때의 내 모습이 그리워졌다.


잔디 뷰 수영장





스위스 대학교에서 즐기는 파인다이닝


학교 다닐 때 교수님들이 공통적으로 하신 말씀이 있다. 스위스에서 제시간은 5분 전이라는 말. 언제나 미리 가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각이 되면 강의실 문을 잠그시던 분도 있었다. 그만큼 우리가 사회로 나갈 때 시간 약속 개념이 잘 잡힌 초년생으로 시작하길 바랐던 스위스다운 가르침이었다. 그때 생각을 하며 예약 시간 몇 분 전에 도착해서 기다렸다.


호텔 관련한 거의 모든 실습을 하는 1학년은 매주 새로운 실습을 하게 되는데 그중 한 곳이 우리가 예약한 레스토랑이다. 이곳은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으로 고급 음식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호텔 또는 미쉘린 레스토랑 셰프의 교육을 받아 학생들이 함께 요리를 하고, 5성급 서비스에 맞는 세세한 트레이닝을 통해 학생들이 제대로 된 실전을 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 현장이다.


실습생들이 때론 긴장하며 실수를 하거나 경력자만큼 능숙하지 않더라도 진심을 다해 해내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다. 전 세계 어디에 가도 고급 레스토랑이 있지만 학생들이 선보이는 파인 다이닝 식사 경험은 특별함이 있다. 그래서 학생과 학부모 외에도 일반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레스토랑이다.


나는 십여 년 전과 다를 게 없는 레스토랑 인테리어도 나를 가르치셨던 선생님이 아직 계시는 것도 놀랍고 기뻤다. 나를 기억하시지는 못했지만 나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스무 살의 나로 돌아간 듯했다. 그리고 변치 않은 이곳을 누비는 후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져 디너 내내 달콤함을 맡을 수 있었다.


유니폼을 입은 친구들은 나와 내 친구들이 아니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친구, 불도저처럼 당찬 친구,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차분히 해내는 친구 모두 우리 반 동기들과 다를 게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딸의 10년 전을 보듯 자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처음 온 남편과 제부는 모든 게 신비로워 즐거워했다. 오랜만에 다시 온 동생과 나는 깊숙이 묻혀있던 기억을 되살려 몽글몽글한 추억 여행을 함께 했다.


치즈 플래터 설명을 들으며


인원이 여덟 명이라 두 테이블로 나눠 앉은 우리는 서로 다른 경험을 했다. 실습 첫 날인 월요일이라 그랬을까. 내가 앉은 테이블에서는 기대에 못 미치는 메뉴가 1-2개 있었다. 반면 부모님 테이블은 모두가 입을 모아 극찬을 했다. 미식가인 이모는 메뉴 하나하나가 다 완벽했고 평소 소식하는데 한 술도 남기지 않고 다 먹을 정도로 좋았다는 평을 했다. 우리 테이블 요리를 맡은 학생들이 조금 더 긴장을 했었나 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나무랄 것 없이 좋았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한 친구들을 보는 즐거움이 바로 이 레스토랑의 묘미이고 나는 후배들이 사랑스러워 그저 흐뭇했다.


스위스 호텔학교 파인다이닝 디너


치즈 셀렉션과 디저트까지


메인 식사 전에 나오는 스타터인 아뮤즈부쉬(amuse-bouche)부터 마지막 코스인 디저트가 나오고도 3-4가지의 한 입크기의 디저트들까지, 대략 10코스는 되는 식사였다. 끝으로 예상치 못 했던 졸업생 할인과 졸업생 배지, 그리고 틴 케이스에 담긴 퍼프 페이스트리까지 감동은 배가 되었다.


졸업생 배지ㅎ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추억 여행


4시간 동안의 디너파티를 마치고 나오니 학교는 고요한 밤이 되어 텅 비어있었다. 이제 떠나면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일이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번에는 8년이나 기다렸다 오지는 말자. 반토막 내서 4년 만에 다시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오겠다 다짐하며 학교를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나의 학교 푸드코트 :)


20대 초반에 열정과 패기로 무장한 내가 살았던 곳. 지극히 외향적이던 내가 에너지를 뿜어내며 전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과 열심히 놀았던 곳. 그런 추억이 가득한 학교를 가니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나게 된 것 같았다. 지금은 조금 내향적으로 바뀌었고 두려울 것 없던 예전과 달리 조심스러운 일도 많아졌다.


하지만 학교가 새 단장을 하고 나의 얼굴도 성향도 조금 달라졌지만 전부 변한 것은 아니다. 캠퍼스를 채우는 학생들의 열기와 에너지는 세대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다. 나는 30대가 되었지만 20대 때도 지금의 나도 온전히 나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다른 듯 같고 같은 나지만 달랐던 10년 전의 나를 만나 좋은 기운을 얻었다. 10년 뒤에 내가 지금의 나에게 똑같이 에너지를 받는다면 기쁠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현재 나에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나에게 이번 추억 여행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고 그 덕에 현재를 보게 된 시간 여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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