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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know Apr 10. 2023

외계인의 별, 지구

소설 <나를 키우는 주인들은 너무 빨리 죽어버린다> 비평문



  이 글에서는 먼저 간단한 작품의 줄거리와 함께 작품에 등장하는 표현들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말해볼 것이며, 그 후에는 작품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에 대한 필자 나름의 생각을 말해보도록 하겠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자신의 할머니 ‘희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공간 도약이 가능한 시대에 희진은 외계 지성 생명체를 찾기 위하여 우주로 떠나나, 그들은 항해 중에 지구와 매우 흡사한 행성을 찾게 되고 잠시 경로를 트는 과정에서 그들의 우주선에 문제가 생기고 만다. 그렇게 그녀의 10년간의 외계 행성 표류기가 시작된다. 


  그녀는 그곳에서 지성 생명체를 조우하게 되고, 그들 중에서도 ‘루이’라는 개체의 관리 아래 지내게 된다. 희진은 그들을 키가 크고 회색의 단단한 피부를 가진 인간의 먼 친척 같다고 묘사했는데, 영화 프로메테우스에 나오는 외계인이 연상되어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본인이 상상한 모습과는 다르다며 진부한 모습이라고까지 말했다. 필자도 사실 외계 생명체라고 하면 영화 에일리언의 외계 생명체같이, 인간과는 아주 다른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데, 이는 무의식 중에 아직 보지도 못한 그들을 이미 차별하고 적으로 두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 특히 ‘루이’라는 존재는 그런 필자의 편견을 깨버린 인물이었다. 그는 희진을 처음 조우했을 때 동료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주었으며, 자신들의 거주지로 데려와 먹을 것과 물을 제공했다. 처음에는 그들이 희진을 살찌워 먹으려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루이의 행동으로 보아 그런 의도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다른 무리로부터 공격받지 않도록 표식을 만들어주었고, 다른 생물로부터 보호해주었으며, 탈출 셔틀의 부품을 발견해 기뻐하는 희진에게 더 많은 과일을 주며 축하해주는 모습까지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작가가 상상에 의존해 그려낸 것이지만, 외계인을 적대적으로 그려낸 많은 작품들과는 달라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인류의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먼 미래에 어쩌면 외계인과 조우할 수도 있을 텐데, 작가의 이러한 외계 생명체에 대한 관점은 우리가 서서히 갖춰 나가야 할 관점이 아닐까, 하는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이 지나고, 채집을 마치고 돌아온 희진은 루이가 잠든 것처럼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어도 몇 달 동안이나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루이의 죽음은 희진에게 꽤나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곧 두 번째 루이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죽음 뒤에도 자아가 육체만을 바꿔 계속 살아간다고 믿었다. 처음에 행성에 와 루이를 조우하는 장면에서 첫 번째 루이를 만났다고 한 표현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그들의 독특한 문화 때문에 비롯된 표현임을 이때 알게 되었다. 그들의 수명은 3년에서 5년 사이인지라, 여러 번의 루이가 그녀 곁에 머무르다 떠나갔다. 네 번째 루이에 이르러 희진은 그들이 색채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노을을 본 희진은 루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에게는 저 풍경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보이겠네.

  우리에게 ‘풍경이 말을 걸어온다.’라는 표현은 완전히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루이에게 있어서는 그리 비유적이기만 한 표현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채를 언어로 사용하면 일상적인 주위의 환경들도 꽤나 색다르게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물이 띠는 색들을 그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이라 느낄 수 있다면, 그들이 필자에게는 과연 어떤 말을 건네올지 궁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루이에게 노을은 어떤 말을 걸어오는 것일까? 수고했어, 그리워 등의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색채 언어를 사용하는 루이의 입장에서 이 세상의 모든 곳, 모든 것은 대화의 대상일 것이다. 모든 것들이 대화를 걸어오는 세상인 것이다. 자연물들과 교감한다는 표현도 가능할 것이다. 마치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나비족처럼 말이다. 희진이 만난 루이는 다섯 번째 루이가 마지막이었다. 그를 막 만났을 무렵, 천적의 습격을 받아 피난하던 도중에 희진은 탈출 셔틀의 신호를 찾아 행성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구조된 희진은 탈출할 때 가져온 루이의 종이들을 대상으로 한 색채 언어 해석에 일생을 몰두했는데, 루이가 그토록 열심히 그리던 것은 평범한 관찰기록이었다. 그것에는 희진에 대한 루이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 희진에 대해 루이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비록 언어도, 생김새도, 사는 행성도 다르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아름답다고 표현했다는 것은 10년 동안 쌓은 그들의 교감이 특별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이 작품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또 다른 부분은, 어떤 소재를 은근슬쩍 툭 제시하여 그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한다는 것이었다. 분명 SF이기에 큰 줄기는 가볍게 읽혔지만 초반부에 툭 제시된 표현들은 필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 첫 번째 표현은 이것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것이라는 장담. 그런 말들이 당시 뉴스를 연일 채웠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일자리에 관련되어 점차 큰 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작업의 기계화로 인한 인간 일자리 소외 현상이다. “사람들은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것이라는 장담.”이라는 표현을 읽었을 때 필자의 감상은 이러했다. 작품 속 세계의 사람들은 온갖 일을 다 해내는 기계에 대해 묘한 열등감을 느끼며, 자신들은 현재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라는 인식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짧은 문장 안에서 고독과 무력감, 희망과 기쁨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시공간 도약까지 가능하게 된 미래 사회에서 기계화로 인한 인간 소외 현상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일 것이다. 아마 모든 분야에서 기계는 인간의 일을 대신 할 것이다. 인간이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일지도 모른다. 일하지 않아도 기계의 노동으로 모든 이들이 풍요롭게 사는 시대일지도 모른다. 요리도, 빨래도, 청소도 모두 기계가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풍요와 편안함의 정도와 인간 고독의 문제는 다른 문제다. 아무리 편하게 생활한다고 해도 인간은 무언가 자신의 ‘일’을 찾아서 해야 하는 동물이라는 작가의 생각이 저 한 문장에 담겨 있다. 우리는 보통 일하기를 매우 싫어한다. 직장인들에게 꿈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꿈이 ‘퇴사’라고 하는 진심 섞인 농담이 오랜 시간 인기를 끌 정도이다. ‘일’이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행위라는 인식이 강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을 하지 않으면 정말 무력감을 느끼고 소외되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일까? 필자의 경험을 떠올려보며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한창 알바에 열중하던 시기가 있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1년 가까이 알바를 지속했다. 점심부터 저녁까지 피자를 만드는 꽤나 바쁜 알바였다. 그러다가 겨울방학이 오자 군 입대를 준비하기 위해 알바를 그만두었다. 2월 말에 입대 예정이었으니 두 달 정도 시간이 있었다. 한동안은 정말 좋았다. 매일 늦게 자고, 게임도 실컷하고, 영화도 드라마도 질릴 정도로 봤다. 그러나 그런 생활도 몇 주가 지나자 지겨워졌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무력하게 누워만 있는 시간이 길어져 갔다. 분명 그렇게 하기 싫다고 느끼던 알바였는데 알바를 하던 때보다도 몸에 힘이 없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경험을 떠올리니 작가의 표현에서 느껴지는 생각이 이해가 갔다. 생각해보면, 인류는 먼 옛날 무리를 지어 생활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각자의 역할에 따라 임무를 수행했다. 그 오랜 기간 일을 하며 살아온 인류에게 있어 ‘일’이란 이미 유전자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 행동 패턴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게 일이란 단순히 생계 유지를 위한 노동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노동을 하고 그에 맞는 인정을 받으며, 그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 이것이 인간이 일을 싫어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하지 않으면 뭔가 허전한 느낌마저 드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큰 줄기에서 미래를 배경으로 한 외계 지성 생명체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미래 사회에서 충분히, 어쩌면 당연히 발생할 인간 소외 문제를 은근슬쩍 짚고 넘어가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그 두 번째 표현은 이것이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이 간절히 찾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한 채였다. ‘정말로 우리는 혼자인가? 이 넓은 우주에 정말 우리뿐인가?’


  작품 속 인류가 외계 지성 생명체를 찾아 떠난 탐사의 시작은 이 물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외계 지성 생명체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은 사실 현실 세계에서도 존재한다. 우주선에 지구의 문자, 지구의 좌표 등등을 넣어 외계로 보내는 행위가 실제로 행해진다. 외계의 존재가 우리를 알아채고 그들의 존재를 알려오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행위가 일어나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생긴다. 

  작가는 그 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구 밖에서도 말이 통하는 상대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즉 우리는 외로운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물음은 새로 생겨났다. 지구 안의 같은 인간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인가? 마음속에 생겨난 이 질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예를 들어보자. 한 존재의 앎의 테두리가 자신이 사는 집 마당에 그친다면 그 존재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가족과 이야기를 하며 지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밖’이라는 공간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그 존재는 ‘밖’에는 나와 같은 존재가 아무도 없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생기고 밖의 존재들과 접촉하고픈 열망, 즉 외로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서 다른 존재를 만나면, 이번에는 다른 마을, 그 다음은 다른 나라, 다른 대륙으로 번지게 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나고 자른 땅을 벗어나 최초로 다른 땅에 발을 들인 존재의 행위에는 그러한 외로움의 해소 욕구도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앎의 영역이 점차 확대되어 인류의 앎은 우주까지 넘어왔다. 인류는 이 광활한 우주에 정말 우리뿐인가, 하는 물음과 함께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끝을 모를 정도로 넓은 이 우주에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정말 우리뿐이라는 상상은 그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외롭기 때문이다. “정말로 우리는 혼자인가? 이 넓은 우주에 정말 우리뿐인가?”라는 작가의 표현은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 해소의 욕구를 잘 담아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 표현은 이것이다.

우주의 지성 생명체들은 없던 것이 아니라 단지 지구인들을 원하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희진이 실종된 40년 동안 지구에는 외계 지성 생명체가 단 한 번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접촉을 해왔다. 그러나 그 접촉은 부정적인 답볍이었다. 어떠한 교류도 원하지 않고,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말이 통하는 상대를 찾아 헤매었으나 정작 그 당사자는 우리와 말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을 떠돌다가 처음으로 대화가 통하는 한 존재를 발견했으나 그가 나와 말하기 싫다고 등을 돌려 떠나버린 것과 같다. 인류에게 접촉해온 그들은 인류가 겪고 있는 외로움 해소의 욕구를 이미 해결한 상태일 것이다. 이미 우주에 대화 가능한 지성체들이 자신들 말고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지구보다 더욱 발전된 기술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굳이 지구와 교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실 지구에 접촉해온 외계 지성 생명체의 태도는 더 먼 미래에 지구인이 취할 태도인지도 모른다. 타인을 향한 미칠듯한 외로움이 해소되면 다시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니 말이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를 원한다고 해도 상대방도 우리를 원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친구 관계나 남녀 관계의 시작에 있어서도 그 마음이 쌍방향이기란 참 드문 일이니 말이다.

  지금까지 간단한 줄거리와 함께 인상적이었던 부분에 대한 감상을 적어보았다. 사실 이 작품의 리뷰 발표문과 비평문을 쓰려고 했을 때, 상당히 난감했다. 작품을 처음 다 읽고 난 뒤의 감상은 ‘아, 재밌었다.’ 이게 끝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읽을 때는 정말 재밌고 좋았는데, 막상 글을 쓰려고 보니 작품 선정을 잘못한 건가? 하는 후회도 잠시 들었다. 그러나 3번 정도 읽었을 때, 재미 뒤에 숨어있던, 어쩌면 재미에 일조했던 표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작품에서 나름의 의미도 도출해낼 수 있었다. 표현들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고, 이제 작품에서 필자 나름대로 도출한 작품 속 의미에 대해 말해보겠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할머니는 무력하고 유약한 이방인이었기에 환대받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그들을 해칠 만한 어떤 힘도 무기도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다시 만날 때는, 더는 유약한 이방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아마 도구를 가져갈 것이다. 루이와 할머니의 관계는 재현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부분을 읽고, 어쩌면 우리 자신에게 타인은 외계인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과 타인의 관계가 루이와 희진과의 관계보다 나은 것이라고는 말이 통한다는 것 하나뿐이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생김새도 다르고, 사는 지역도 다르다. 유일한 나은 점이라고 했던 말이 통한다는 점조차도 때때로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야말로 외계인인 것이다. 작품에서 희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채로 간절히 “도와줘”라고 말하며 루이에게 다가갔다. 루이는 그녀의 간절함을 느끼고 그녀를 구해주었으며 결국 그녀에 대해 아름답다고까지 하며 마음을 열었다. 작가는 어쩌면 우리의 관계도 이래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처음 맺을 때, 얕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호감을 느껴 먼저 다가가는 경우에도 얕보이고 싶지 않아 자신을 숨기고, 상대방을 먼 거리에서 자신의 잣대에 맞추어보기도 한다. “도구를 가져갈 것이다” 표현은 인간관계에 있어 그러한 계산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라 느꼈다. 그런 식으로 다가가서는 루이와 희진의 관계처럼 순수한 정신적 교감이 이루어지는 관계는 결코 맺어질 수 없다며 작가가 필자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희진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내려놓고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며 다가가는 것이 진정한 관계의 시작이라고 말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생각하기에 인상적인 표현과 그에 대한 느낌과 생각 그리고 작품에서 필자 나름대로 도출해낸 의미에 대해 말해보았다. 사실 오랜 시간 동안 SF장르를 읽지 않다가 정말 오랜만에 읽어본 SF였다. 어릴 적에는 소설이라고 하면 무조건 SF를 읽었으나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SF는 점차 읽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SF를 싫어한다는 것은 아니다. SF를 좋아해 여러 작품을 찾아서 읽어도 보았으나 그 질이 만족스럽지 못한 작품이 많았다.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나, 전문지식이 있어야만 부드럽게 읽을 수 있는 작품 등 판타지 장르와 함께 다른 장르에 비해 유독 질이 낮은 작품이 많이 보였다. 작품 선정의 불만족 빈도가 높아지자 어느 순간부터 SF를 멀리했던 것 같다. 그러나 김초엽 작가의 이 작품은 필자가 다시 SF의 매력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검증된 SF 작가를 한 명 알게 되어 매우 보람된 과제 활동이었다. 이 작품의 매력은 루이와 희진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관계에 있어서의 태도에 대한 의미를 전달했다는 점도 있겠지만, 중간중간에 독자를 고민하게 할 만한 소재들을 툭툭 던져 잠시 읽기를 멈추고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다.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면서 읽는 내내 즐거움을 준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고 깊게 분석해본 경험은 필자가 다시금 SF의 숲에 빠지게 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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