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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know Apr 10. 2023

다 커도 혼자 우는 건 외롭다.

영화 <올드보이> 비평문


     

  이 글에서는 영화 올드보이에 대해 비평해보고자 한다. 영화 올드보이는 츠치야 가론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다. 먼저 원작에 대해 살펴보자. 원작 만화는 주인공이 10년간 감금당한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 영화에서 오대수가 15년간 감금당한 것과 차이가 있다. 원작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라고 느낀 것은 감금의 이유이다. 원작에서는 학창시절 자신의 노래를 듣고 주인공이 흘린 눈물을 왕따인 자신에 대한 동정으로 느꼈기 때문에 주인공을 10년이나 감금한 것이다. 이러한 전개는 많은 독자들이 허무함을 느끼게 했으며 그 감금의 이유를 납득시키지 못했다. 이와 달리 영화에서는 15년간의 감금의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금기라고 불리는 근친상간의 목격자인 오대수가 소문의 시초이고 그 소문으로 인해 자신의 연인인 누나가 자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올드보이는 원작을 잘 각색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영화 올드보이를 감상하며 분석할 만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짚어가며 글을 전개해보려고 한다.      



  먼저 분석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짚어가며 그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다. 

  영화는 옥상에서 대수가 자신의 이름에 대해 생각하며 화면이 전환되면서 시작한다. 대수가 만취해 경찰서에서 난동을 피우는 장면으로 전환되며 스토리가 시작된다. 오대수는 자신의 이름이 ‘오늘만 대충 수습하면서 살자’라는 의미라고 말한다. 이는 오대수의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현재에 하고 싶은 걸 하기에 그것을 ‘수습’해야 하는 오대수의 성향을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성향이 오대수에게 닥친 비극의 원인이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수습이 잘 안 된다.

이는 오대수에게 곧 닥칠 비극을 암시하는 것이다. 지금껏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대충 ‘수습’하며 어디선가 저질렀을 과오와 자신에게 쌓인 증오를 감당해야 할 시간이 다가올 것임을 암시한다. 

  대수는 주환의 도움으로 풀려나는데 딸 연희에게 전화를 하며 곧 갈 것이라며 버벅거리며 말한다. 이 버벅거림은 작품 말미에도 나타나는데, 미도가 자신의 딸 연희였단 것을 알고 그녀에게 전화하면서 또 다시 15년 전 그때처럼 버벅거린다. 버벅거림은 대수가 미도를 딸로 인식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대수는 그렇게 통화를 마친 뒤 갑자기 사라지고 15년간 감금된다. 


  오대수는 그곳에서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적기 시작한다. 노트 빼곡이 몇 권씩이나 적는다. 그 정도로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대충 ‘수습’하며 살아온 것이다. 

  오대수는 자신의 부인이 죽은 것을 뉴스를 통해 알게 되고, 그 용의자로 자신이 지목됨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온 몸에서 개미가 나오는 환각을 보게 된다. ‘개미’는 주로 우울증 환자에게 많이 보이는 환각이다. 개미는 떼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홀로 우울증을 겪는 이들에게 자주 보이는 환각이다. 대수는 큰 충격과 함께 자신의 가족이 파괴되어 갈 곳도 없게 되었다는 데서 오는 고독감으로 인해 우울증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오대수는 15년을 잘 버티는데, 이는 작품 중반부에서 알 수 있듯이 철웅이 우울증 약을 먹였기 때문이다. 15년간 감금당하다가 풀려난 대수는 미도가 일하는 어느 횟집에 들어간다. 그때 둘은 서로 낯익어 한다. 이는 둘이 부녀 사이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대수는 미도와 손이 닿자 기절한다. 미도의 집에 가게 된 대수는 화장실에서 미도와 관계하려 하나, 저지당한다. 이에 미도는 민혜경의 노래 ‘보고 싶은 얼굴’이 관계의 신호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곡은 사실 대수가 감금당할 당시 TV에 나온 곡으로, 그때 대수는 민혜경을 보고 자위를 시도했다. 그 노래는 우진이 대수가 미도를 성적으로 느끼게 하도록 세뇌하는데 사용한 도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우진의 ‘보고 싶은 얼굴’은 누구일까? 자살한 누나 이수아, 오대수 모두 해당한다. 다만 어떤 감정에서의 보고 싶음인지에 따라 다르다. 사랑과 미안함, 후회의 감정에서 오는 보고 싶음의 경우라면 이수아가 대상이고, 증오 그리고 복수의 감정에서 오는 보고 싶음의 경우라면 오대수가 대상이다. 이러한 감정을 바탕으로 노래를 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우진은 대수-미도의 관계에서의 세뇌 효과를 위해서도 이 노래를 택했을 것이다. 세뇌를 통해 서로를 ‘보고 싶은 얼굴’로 인식하게 한 것이다. 이는 대수가 자신과 똑같이 근친상간을 하게 하려는 우진의 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다 알고도 사랑한 자신과 수아처럼, 너희들도 그럴 수 있겠냐는 마지막 물음을 던지기 위해 그 노래를 택한 것이다. 

  자신을 가둔 이를 찾기 위해 애쓰던 대수는 미도가 에버그린이라는 닉네임의 사람과 화상채팅하는 것을 본다. ‘에버그린’이라는 닉네임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사전적으로 상록수라는 의미인데, 이는 대수와 우진의 고등학교인 상록고등학교를 의미한다. 우진이 대수에게 자신에 대한 힌트를 던져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 보면, 우진은 대수에 비해 상당히 젊은 모습으로 나온다. 이는 우진이 소년 시절의 기억에 갇혀 있음을 나타낸다. 내내 푸른 나무를 의미하는 상록수는 이러한 우진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대수로부터 시작된 비극이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유효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철웅의 감금시설에서 싸움을 치른 뒤 기절한 대수는 미도의 집에서 깨어나고 주환의 도움으로 에버그린의 주소가 미도 집 맞은편임을 알아낸다. 그곳에서 그는 드디어 에버그린을 조우한다. 에버그린은 자신을 죽이려는 대수에게 자신을 죽이면 왜 가두었는지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에버그린, 즉 우진이 이 복수를 얼마나 기다려왔는지를 느낄 수 있었던 대목이다. ‘숙제’를 내준다고 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대수를 어린애 다루듯 타이르는 우진의 표정에서 그가 이 복수를 얼마나 고대해왔고 즐기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상록고등학교에 도착해 에버그린이 이우진임을 알아낸 대수는 주환에게 이수아에 대해 묻는다. 그는 그녀가 걸레라고 하고 그걸 들은 우진은 주환을 죽인다. 우진의 복수는 ‘혀’로 자신의 누나를 죽인 대수에게 그 화살표가 향해 있다. 그런데 그 소문의 시초에는 대수만이 아니라 주환도 있다. 대수가 재차 비밀을 요구했음에도 주환은 그 비밀을 폭로했다. 이수아의 죽음은 대수, 주환의 합작인 것이다. 따라서 주환이 피시방에서 죽지 않았더라도 우진의 복수 계획 안에서 그는 이미 죽을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우진을 추적하던 대수는 우진의 집을 찾아가게 된다. 그곳에서 우진을 조우한 대수는 자신을 ‘왜 가두었는지’에 대한 추측을 말한다. 숙제를 제출한 것이다. 그러자 우진은 진실을 말해준다. 그 진실은 대수의 혀가 수아를 임신시켜 자살하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 철웅의 녹음테이프에서 나온 대수가 갇힌 이유는 ‘말이 많아서’였다. 이때부터 대수가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혀는 부드럽지만 날카롭다. 그 부드럽고 쉽게 내뱉은 소문이 날카로운 비극으로 대수에게 다가온 것이다. 

  우진은 ‘왜 15년을 가두었는지’가 아니라 ‘왜 15년이 되어서야 풀어줬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한다.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면서 풀어준 이유가 서사적 쟁점이 된다. 그러면서 우진은 레이저포인터로 보라색 상자를 가리킨다. 대수가 그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미도의 성장 앨범이 들어 있다. 이는 관객 입장에서 굉장히 충격을 주는 장면이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도 대수와 미도의 관계를 눈치채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눈치채더라도 어렴풋이 ‘설마’하는 식으로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미도가 대수의 딸임을 그 앨범 하나로 보여주면서 관객의 충격을 극대화한 것이다. 그 충격이 ‘풀어준 이유’의 대답이 된다. 

  이 작품의 ‘보라색’에 주목할 만하다. ‘보라색’이 나타나는 비중이 상당하다. 대수를 납치한 사람의 우산 색, 대수가 15년간 먹은 군만두를 판 중국집의 이름(자청룡=보라색 용), 대수가 피를 닦은 수건의 색, 철웅의 손이 든 상자의 색, 미도의 앨범이 든 상자의 색 등 많은 것들에 보라색이 쓰였고, 이는 어떤 의미가 담겼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보라색은 신비, 아름다움 등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확실히 그런 상징이 아닌 걸 알 수 있다. 보라색은 죽음, 슬픔, 구원, 속죄, 악, 폭력, 복수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확실히 이러한 상징이 이 작품에 어울린다. 이 작품에 쓰인 보라색은 사실 이우진이 선택한 색이다, 즉 이우진의 심리가 반영된 색인 것이다. 누나의 ‘죽음’에 대한 ‘슬픔’, 또 그에 대한 ‘속죄’와 자기‘구원’, 한편으로는 누나의 죽음을 이끈 오대수에 대한 ‘폭력’, ‘복수’를 하고자 하는 이우진의 내면이 반영된 것이다. 

  한편 천사날개를 멘 미도에게도 보라색 상자가 도착한다. 15년 전 연희, 즉 미도의 생일 때 대수가 준비한 그 천사날개이다. 미도가 그 천사날개를 멨다는 것은 그녀가 이제 대수에게 ‘딸 연희’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수는 우진에게 자신을 다 내려놓으며 자비를 구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혀를 스스로 자른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인 자신의 혀를 자름으로써 우진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우진은 그런 대수를 보며 자비를 베푼다. 미도에게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대수는 자비를 구한 것이지, 용서를 구한 것은 아니었다. 우진이 심장 스위치를 떨어뜨리자 그것을 주워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심장이 멈춘 것은 우진이 아니라 대수였다. 그 버튼은 그를 더 큰 절망으로 떨어뜨리는 버튼이었다. 자신의 딸인 미도와 자신이 관계하는 소리가 재생된 것이다. 절망의 수렁텅이에 빠진 대수를 두고 우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그러고는 고등학생 시절 수아를 댐 위에서 붙잡던 장면으로 전환되나 싶더니 우린 우진과 젊은 우진이 겹쳐진다. 이는 어린 우진의 고통이 어른이 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어린 우진은 결국 수아의 손을 놓는다. 그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소문과 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진은 그 선택을 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 놓아버린 손의 자세가 총 자세로 바뀌더니 그는 자살하고 만다. 누나이자 연인인 수아를 놓아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살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기엔 우진의 자살은 너무 늦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복수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대수에 대한 복수를 마무리한 지금에서야 그는 자신에게 남은 죄책감의 값을 치를 수 있었던 것이다. 삶의 목표였던 복수를 이룬 뒤에 오는 공허함은 이제 그를 온전히 과거의 절망 속에 위치시킨 것이다. 한편으로 우진의 자살은 대수에 대한 마지막 복수이다. 대수는 자신에게 절망을 안겨준 우진을 어떻게든 죽이고 싶어 할 테지만, 그는 이미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복수가 이미 자신의 ‘성격’이 되어버린 대수에게 복수할 대상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크나큰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다. 

  대수는 설원으로 가 최면술사에게 다시 최면을 받는다. 그는 미도가 자신의 딸인 것을 잊고 미도와 연인으로 살 것을 택한다. 마지막에 보인 그의 웃음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 웃음은 마치 오대수의 감금방에 있던 제임스 엔소로의 <슬퍼하는 남자>라는 그림과 닮아있다. 또한 감금방에 그 그림과 같이 있던 시도 떠오르게 한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


엘라 윌콕스의 <고독>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그림과 시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한 건 무엇일까. 그림 속의 남자는 웃고 있지만 제목은 <슬퍼하는 남자>이고, 시의 화자는 웃으라고 말하고 있지만 제목은 <고독>이다. 복수를 성공했을 때 느끼는 짧은 희열. 그러나 그 뒤에 곧바로 밀려드는 공허함과 고독. 그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감정의 전개는 오대수와 이우진 모두에게 나타난다. 오대수는 펜트하우스에서 심장 스위치를 누름으로써 순간의 희열을 느꼈을지 몰라도, 결국 그의 모습은 설원의 <슬퍼하는 남자>이다. 이우진의 경우, 심장 스위치로 복수의 대미를 장식하고 엘리베이터라는 밀실에 위치하니 밀려오는 공허함과 고독, 그리고 죄책감으로 인해 자살하게 된다. 복수의 끝에는 두 명의 <슬퍼하는 남자>만이 남은 것이다. 



  지금까지 줄거리를 따라 작품을 분석해보았다. 두 남자의 서로를 향한 복수극이 잘 짜여진 서사로 완성된 웰메이드 작품이다. 그런데 단순히 보면 복수극이기만 한 이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오이디푸스>가 담겨있다. 지금부터는 <올드보이>의 ‘오이디푸스 모티프’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올드보이>는 근친상간을 소재로 다뤄 개봉 당시 많은 논란이 있던 작품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상영중단되지 않고 흥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근친상간이라는 금기가 영화라는 예술로 승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근친상간이 금기의 영역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지구상의 대다수 인류는 근친상간을 금기로 여긴다. 금기를 위반하면 처벌이라는 대가가 따르게 된다. 이 작품에서도 이러한 ‘금기→위반→처벌’ 구조를 따른다. 이우진은 이수아와의 근친상간으로 금기를 위반한다. 이러한 위반으로 인해 그는 처벌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이수아와 본인의 죽음이다. 오대수는 본의가 아니긴 했지만 자신의 딸 미도와 근친상간을 함으로써 금기를 위반한다. 이러한 위반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혀를 자름으로써 스스로를 처벌한다. 오대수의 처벌행위는 오이디푸스의 처벌행위와 닮아있다. 먼저 <오이디푸스>를 간략히 살펴보자.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신탁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이라기에 테바이의 왕은 아들을 죽이라 명하지만 신하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산에 버려둔다. 아이를 발견한 이웃 나라의 왕과 왕비는 그를 거둬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준다. 이웃나라의 왕자로 살아가던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받아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일 운명이라는 것을 듣고, 나라를 떠난다. 그러다 길에서 만난 테바이 왕, 즉 아버지를 죽이게 되고, 스핑크스의 질문을 맞춰 테바이의 왕이 되어 자신의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아이도 낳는다. 결국 그녀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게 되고 자살한다. 오이디푸스도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게 되어 자신의 눈을 찌르고 장님이 되어 아테네를 떠돌다가 죽게 된다. 오대수와 오이디푸스는 금기를 위반한 대가로서의 처벌을 스스로 부여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른 것처럼, 오대수는 자신의 혀를 잘랐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와 다른 점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오이디푸스와 달리 오대수는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오대수는 최면술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는다.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결국 그는 최면을 통해 미도가 딸임을 잊고 그녀와 연인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이는 인물이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생에 대한 의지가 나타나는 부분이다. 오이디푸스와는 다른 오대수의 결말을 통해 비극적 현실을 맞이함에도 생에 대한 의지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자 한 의도가 드러난다. 둘째, 이오카스테와 달리 미도는 진실을 모르고 자살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랑해요, 아저씨


  영화의 마지막에 오대수를 안으며 하는 미도의 말은 진실을 아는 관객의 입장에서 가슴 아픈 장면이다. 어쩌면 그러한 결말이 이오카스테처럼 진실을 알고 자살하는 것보다 슬픈 연출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영화 <올드보이>의 줄거리부터 오이디푸스 모티프까지 살펴보며 비평해보았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가장 뇌리에 남는 장면은 역시 마지막의 오묘한 오대수의 웃음이다. 그 표정은 마치 철웅의 감금방에 걸려있는 그림을 빼다 박은 것 같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 마지막 대수의 그 웃음은 최면 전의 오대수가 남긴 사후경직이 아닐까. 처절한 복수극과 금기 뒤에 마주한 비극의 끝에서, 진실을 혼자만이 간직한 그 고독 속에서 혼자 울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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