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Uknow Apr 10. 2023

성령실격, 인간합격

원작소설 <벌레이야기>와 영화 <밀양>의 비교 분석



  이 글에서는 원작소설 <벌레이야기>와 영화 <밀양>을 비교하고 분석해보려 한다. <벌레이야기>부터 살펴보자. 이 작품은 약국을 운영하는 남편의 시점으로 아이를 잃고 절망에 여러 방향으로 대항하는 아내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부부의 아이 알암이는 다리가 불편하기 때문인지 내성적이어서인지 친구가 없지만 최근 주산에 흥미가 생겨 그에 몰두하는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알암이가 학원이 끝날 시간이 한참 넘어서도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부부는 파출소에 실종 신고를 하고 매일을 알암이 찾기에 몰두한다. 그러나 아내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암이를 찾고야 말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아이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두 달 뒤, 알암이는 어느 건물 지하에 매장된 채로 발견되었다. 명백한 유괴살인이었다. 두 달 내내 결코 무너지지 않았던 아내는 결국 무너졌다. 며칠을 그러던 아내에게 김집사가 찾아와 기독교를 전파했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도 종종 찾아오던 그녀였다. 지난 두 달 동안에 아내는 아이를 찾고자 하는 심정으로 절과 교회를 모두 다니며 돈을 바치곤 했다, 이번엔 김집사가 찾아와 알암이가 죽은 것이 하느님의 뜻일 수 있다며 헛소리를 하자 그녀는 결국 폭발했다. 범인을 찾아 자신이 죽이겠다는 복수심이 그녀를 다시 일으켜세웠다. 그러던 중 결국 범인이 잡혔는데, 그는 알암이가 다니던 주산학원의 원장이었다. 그는 사형이 확정되었지만 사형이 미루어지게 되었다. 범인이 아직 살아있기에 아내의 분노는 아직 향할 곳이 있었고 더 살아갈 수 있었다. 김집사는 꾸준히 그녀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녀가 마찬가지로 걱정된 남편도 그녀에게 교회를 권했다. 결국 그녀는 착실히 교회에 다니게 되나, 그것은 오직 알암이의 구원을 위해서였다. 시작은 그랬으나 그녀는 주님의 참뜻을 깨닫게 된다. 김집사는 아내에게 범인을 용서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결국 교도소에 찾아간다. 그러나 그 이후 평온했던 그녀는 다시 절망과 분노, 배신감의 늪에 빠지게 된다. 범인은 이미 주님에게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믿었던 신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고 범인의 사형이 집행된 날의 며칠 후 그녀 또한 약을 먹고 자살한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내용이다. 두 작품은 대체로 비슷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어 한 작품 한 작품을 따로 분석하기에는 같은 말이 너무 많이 중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분석은 생략하고, 영화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서 그것과 함께 분석을 진행해보겠다. 그 후에는 소설과 영화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보려 한다.


  신애와 준의 밀양 생활은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들의 시작부터 알 수 있다. 차가 고장난 것이다. 카센터에서 일하는 종찬이 와서 그들의 차를 고쳐준다. 그때부터 종찬의 힘든 사랑이 싹을 튼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애는 종찬의 도움으로 피아노 학원과 집을 얻는다. 신애는 개업 기념 떡을 돌리는데, 여기서 신애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신애는 카센터에 가서 떡을 준다. 잠깐 커피 마시고 가라는 이웃들의 호의를 차갑게 거절하고 돌아선다. 그럼에도 준에게 껌을 주는 종찬의 태도와 대비된다. 다음으로 옷가게에 가서 떡을 준다. 그러고는 대뜸 인테리어를 바꾸는 것을 진지한 표정으로 제안한다. 이 떡을 돌리는 행위에서 드러난 신애의 성격은 타인의 기분을 잘 고려하지 않는 특이한 성격이라고 느꼈다. 이는 남편의 외도, 죽음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겸상하지 않기, 조언하기 등은 서울에서 온 고상한 사람이므로 시골 사람과는 수준이 다르다는 신애의 의식이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신애의 그런 차별의식은 준의 학원 차를 타고 가면서 원장과 대화하면서도, 학원 회식 때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회식 때에는 땅을 계약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말한다. 그렇지만 사실 신애에겐 그럴만한 돈이 없다. 그저 우월의식을 느끼기 위한 허세였던 것이다. 이 근거 없는 허세는 그녀가 겪을 비극의 발단이 된다. 결국 그녀의 파멸은 그녀가 손짓하여 불러온 것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종교 문제는 약국에서 처음 시작된다. 약국에서 김집사는 그녀를 약국으로 불러들인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신애같이 불쌍한 사람은 하느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전혀 낯설지 않은 장면이었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그런 식으로 무례하게 전도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김집사의 말에 신애는 불쾌함을 약간 드러내지만 화는 내지 않고 돌아간다. 준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서둘러 집으로 간다. 신애는 준이 자신을 놀라게 하려는 것임을 알고 연기를 한다. 이 사건은 준의 실종을 암시한다고 느꼈다. 신애는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 밤늦게까지 논다. 준의 전화가 와도 금방 들어가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거기다가 신애는 같이 놀던 사람들만 먼저 택시를 태우고 자신은 타지 않는다. 노래방을 나오고 바로 전화가 온 것으로 보아 그때 택시를 탔으면 준이를 구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택시를 타지 않은 것 또한 자신은 그들과 다름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신애는 그렇게 늦게 집에 도착한다. 아무리 찾아도 준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 전화가 걸려오고 전화를 받는 신애의 얼굴이 보여진다. 상대의 목소리는 관객에게 들리지 않지만 신애의 표정만으로 준이 유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도연의 표정이 정말 소름 돋게 그 상황과 감정을 잘 표현해주었다. 신애는 범인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전 재산 470만원을 현금으로 준비하고 약속 장소에 넣는다. 그러나 준은 저수지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곧 이어 범인은 허무하게 잡힌다. 범인은 학원 원장이었다. 신애는 잡혀오는 원장의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겁에 질려한다. 자신에게 준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공포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안겨준 장본인이기에 그의 존재가 두려웠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신애를 보는 원장에게 종찬이 달려가 마구 때린다. 신애를 생각하는 마음이 크단 걸 느낄 수 있었다. 신애는 생리통 약을 사기 위해 찾아간 약국에서 김집사를 마주한다. 김집사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며 기도회에 나갈 것을 권유한다. 그러고는 세상 모든 일에는 주님의 뜻이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이 참 화가 났다. 필자가 신애 역을 맡은 배우였다면 애드리브로 김 집사의 뺨을 때렸을 것이다. 준의 죽음이, 유괴되고 저수지에 빠져 익사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김집사의 말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신이 똑같은 일을 겪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세월호 사건이 생각났다. 어떤 목사는 기도를 하며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희생된 것은 모두 주님의 뜻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댔다. 주님이라는 존재는 무엇이기에 그 무고한 목숨들을 차갑고 고통스럽게 죽일 자격이 있는 것일까. 내면에 이런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심리학자 짐바르도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 상황에 직접 처해보기 전까지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없다.


  김집사와 같은 무례한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아이가 처참히 죽어버린 그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그 때도 주님의 뜻을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정신이 반쯤 나간 신애는 김 집사의 햇빛에도 주님의 뜻이 있다는 말에 햇빛에 손을 대고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고 손을 휘적거리며 말한다. 김 집사를 조롱한 거 같아 조금은 분이 풀렸던 장면이다. 신애는 그 후에 준의 사망신고를 하고 기도회에 찾아간다. 기도회에서 신애는 펑펑 매우 크게 울지만 아무도 신애를 제지하지 않고 이상하게 쳐다보지도 않는다. 상처받은 이들이 모여서 아픔을 해소하는 공간이라는 교회의 긍정적 모습을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신애의 머리에 목사의 손길이 닿자 신애는 신기하게도 울음을 멈추고 진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이후 신애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활동한다. 주위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역에 나가 노래도 부르곤 한다. 준의 죽음으로 인한 아픔이 지워진 것같이 지내지만 그렇지 않다. 하느님과 함께 있어 행복하다 느낀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고 그 모습에 이질감마저 든다. 마치 스스로 최면을 건 거 같은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며 필자는 울렁거림을 느꼈다. 어떻게 자식이 살해되었는데 웃을 수 있을까. 그것은 마음을 배신한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를 믿음으로써 마음이 조금은 안정을 찾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아픔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신애에게 그 모습이 드러난다. 다른 신자들이 없는 조용한 방 안, 혼자 밥을 초라하게 먹고 있는 신애는 그때서야 아픔이 떠올라 눈물을 글썽인다. 신애는 아픔을 느끼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마냥 웃고, 쉴 새 없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피아노 학원의 아이가 화장실에 들어온 것을 보고 “준아!”라고 부른 것은 준의 죽음에 대한 상처가 아물지 않고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신애는 자신의 생일에 신자들 앞에서 학원 원장을 용서할 것이라고 말한다. 목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자 목사는 하느님 말씀 중 가장 어려운 것이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애가 의지를 보이자 그녀를 응원한다. 여기서 목사는 올바른 태도의 기독교인, 혹은 기독교의 선한 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라고 느꼈다. 

  교도소에 가기까지 그녀의 행위는 고귀하고 차원 높은, 신성하게까지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그 안에서 무너지고 만다. 원장은 이미 용서받았다. 그녀의 용서 전에 이미 하느님이 용서한 것이다. 그녀는 교도소를 나와 쓰러지고 만다. 그녀는 그 이후 기독교와의 인연을 끊는다. 이미 용서받은 이에게 자신이 무슨 용서를 하냐는 신애의 말은 타당하고, 그렇기에 화가 난다.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는 모든 이를 향해, 정말 모든 이를 향해 있는 것인가. 그 분별없음에 화가 난다. 신애는 이후 점점 미쳐간다. 신애는 지렁이를 보고 도 넘은 기겁을 하는데, 이는 이상하다. 신애의 반응은 꿈틀거리는 벌레 같은 더러운 세상에 대한 혐오가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필자가 신애의 상황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신애는 CD방에 가서 CD한 장을 훔친다. 그러고는 기독교 집회장에 가서 ‘거짓말이야’라는 가사가 나오는 음악이 울려 퍼지게 한다. 그리고 그날 밤 신애는 준이가 유괴된 그날 밤 받은 전화를 다시 받은 듯이 반응한다. 종찬에게도 전화하여 그 일을 말한다. 종찬은 그 상황을 이용하여 식사약속을 잡는데, 종찬의 속된 면이 나타난다. 다음 날 신애는 약국에 찾아가 강 장로를 유혹한다. 결국 그 둘은 육체적으로 결합되기까지 했다. 그 도중에 신애는 하늘을 보고 소리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보여? 보이냐고.


  이는 신에게 모욕을 안겨주기 위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종찬은 신애를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집에 돌아와 혼자 밥을 먹고 있었으나, 신애가 찾아온다. 미친 상태인 그녀에게 실망한 종찬은 화를 낸다. 그녀는 겁에 질리고 떠난다. 강 장로는 신애와 결합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으면서도 신애를 위한 기도에 참여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인다. 신애는 그곳에 돌을 던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신애는 사과를 씻어 상에 놓고, 집의 모든 불을 다 킨다. 그리곤 사과를 먹고 손목을 긋는다. 그리고서는 천장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봐, 보여?


  필자는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불을 모두 켜는 행위는 신이 그녀의 행동을 잘 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가 먹는 사과는 ‘선악과(First Apple)’를 상징한다. 아담과 이브는 뱀의 속삭임에 선악과를 먹게 되지만, 신애는 스스로 먹는 것임을 신이 보게 하는 것이다. 모욕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선악과를 먹었으니 아담과 이브를 다른 세상에 다른 세상에 보낸 것처럼 자신도 어딘가 다른 세상에 보내달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싶다는 의미에서 손목을 그은 것이다. 그런데 의아한 점은 신애는 밖에 나가서 살려달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 목소리는 간절하게 ‘살려주세요, 제발.’이라고 절규한다. 그것이 신에게 하는 소리는 아닐 것이라 느꼈다.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죽음도 ‘신의 뜻’이라 말하고 다닐 사람들의 모습이 역겨워 죽고 싶지 않아졌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입원하고 시간이 꽤 지난 후에 퇴원한다. 그녀는 밥 먹으러 가자는 종찬의 말을 거부하지는 않고 일단 머리카락을 자르러 간다. 그러나 거기서 일하는 학원 원장의 딸이 그녀의 머리를 잘라준다. 그 딸이 소년원에 갔다 왔다는 것에서 시간이 꽤나 흘렀음을 알 수 있다. 둘은 대화를 하다가 신애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일어나 미용실을 나간다. 그러고는 집으로 가는 중 옷가게 주인을 만난다. 옷가게 주인은 신애의 말대로 인테리어를 새로 했다. 이 부분은 그녀가 이제 완전한 밀양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미쳤냐는 옷가게 주인의 말에 서로 웃는데, 그녀의 작중에서 처음으로 진실된, 꾸미지 않은 웃음으로 느껴졌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와 신애는 머리를 마저 깎는다. 거울을 들어주는 종찬을 거부하지 않고, 그 거울에는 준의 사진이 있다. 신애는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반쯤만 자르고 나왔는데, 이는 그녀의 아픔이 반쯤 꺾였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머리카락 끝부분은 그녀의 머리카락 중에서 그녀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부분이다. 그 머리카락들은 남편의 죽음, 준의 죽음, 신에 대한 배신감 경험 등을 함께 겪어온 것이다. 그 부분을 깎아버린다는 것은 그 아픔이 이제는 그리 아픈 것이 아니게 되었음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준의 사진이 붙어있는 거울을 보며 그녀 자신이 직접 마저 남은 반쪽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는 아픔을 자신의 손으로 잘라내고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또, 종찬이 거울을 들어주는 행위를 신애는 거부하지 않는데, 이는 종찬에 대해 마음을 연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신애의 잘라버린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려 바닥에 날리는데, 그 이동에 따라 카메라가 이동한다. 그 마지막 장면에는 강아지풀의 그림자가 나오고 그 그림자는 한적하게 흔들거린다. 그 장면이 꽤 오래 지속된다. 이는 아픔을 진정으로 치유해주는 것은 신이나 종교가 아니라, ‘시간’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느꼈다.     

  <벌레이야기>는 <밀양>의 원작이고 두 작품의 전체적인 줄거리와 메시지는 크게 다르지 않아 영화를 대상으로 분석을 진행해보았다. 이제 두 작품을 비교해보자면 원작에 비해 영화가 절망에 허우적거리고 그에 다양한 모습으로 반응하는 인간상을 더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는 그 주체를 허영심 가득한 인간으로 설정하여 본인의 허영심이 불러일으킨 비극을 겪는 인물을 보여줬다. 본인이 결국 비극의 발단을 제공한 것이라는 상황을 설정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해당 인물의 절망감을 더욱 잘 공감할 수 있게 했다. 또한 두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는 주인공이 자신이 믿던 신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원작에서는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라고 말하며 그 배신감을 표출하고 그 분노는 자살에 이르러서야 끝나게 된다. 반면 영화에서는 그 표출이 더 적극적이다. 신의 대리자라고 할 수 있는 강장로를 유혹해 성관계를 맺으며 하늘을 보고 신을 조롱한다. 또한 선악과를 상징하는 사과를 베어물며 천장을 보고 신을 조롱한다. 신으로 대표되는 절망, 배신감, 분노에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원작과 달리 주인공이 삶을 계속 살아가는 결말도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원작과 다른 결말을 통해, 인간은 자신에게 부딪혀 오는 고통에 쉽게 무너져내리지만, 그 막대한 고통을 딛고 결국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존재 또한 인간이라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전 02화 외계인의 별, 지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