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이년생 꼰대 Oct 18. 2021

오수몽(午睡夢)

 1학기는 비대면 수업이라 집에만 박히고 2학기는 휴학을 해 또 집에만 박히니 백수 주인을 둔 비숑 프리제를 빼고 날 탐탁히 보는 가족이 없다. 이상의 <날개>와 카프카의 <변신>이 수필이다. 나는 벌레다. 어머니 퇴근에 맞춰 ‘밥 줘 밥 줘 밥 줘’ 뻐끔뻐끔 밥만 축낸다.

 “이 식충아. 넌 낮에 뭐하니? 뭐해?”

이상이 창작한 남자도 아내의 질문에 같은 대답일까.

 “매일같이 꿈을 꾸고 있소.”          


 집에 사는 시간이 느니 꿈의 시간도 는다. 정상에 오른 해가 하산을 시작하고 내 긴 구레나룻을 살랑이 들출 바람이 창틈으로 쏘여 들어오면 에트모스피어는 중력의 여인이 된다. 나를 홀리는 간드러진 속삭임에 몸을 누일 수밖에 없다. 밤잠이 호텔이면 낮잠은 민박. 통상 누추하니 그곳에 꿈이란 귀객은 찾아 들지 않음이 상정이다. 그래 싶었으나 올해는 고등학교를 나와 공부의 긴급함이 없어 쪽잠에서 승격한 낮잠에 밤의 객인 꿈이 찾아와 짐처럼 서사를 호연히 풀어놓는 것이라.     


 꿈은 깨야 떠올릴 수 있다. 낮잠에 깃든 꿈은 깨어나면 미완성 소설로 남는다. 꿈이 밤중에 도착한다면야 결말까지 쓰고 잠이 깨기 전 눈치껏 꼭두새벽에 짐을 꾸려 떠나겠으나 그것이 낮잠에 와버리면 서사를 풀긴 하나 전개 중에 외부인이 들이닥쳐 잠과 함께 쫓겨나기 바쁘기 때문이다. 아닌 낮중에 홍두깨라? 외인은 놀란의 영화처럼 욕조물에 고꾸라트리거나 총을 쏴 꿈속 세계에서 강제로 끄집어내는 ‘킥’의 의인화다. 

 내 낮잠의 주 킥은 알람이다. 1시간만 자는 거다—결심하고 설치한 알람은 그 시간 뒤 내 귀에 터지는 자폭탄이다. 종종은 의문의 킥에 의해 예정 귀한 시간보다 이르게 끄집어짐을 당할 때도 있는 것이다. “@*&#!%~!” 울리는 킥의 발신자는 점심시간에 거시는 어머니, 혹 제3금융권 소속 회색 신사랴. 그 소음에 단잠이 쓴잠으로 갈변하니 성큼 미간이 꼬이지만 후자의 벨이면 쉽게 풀리지 않는다. 알람벨이든 전화벨이든, 그 음악이 클래식이든 애청곡이든 내 꿈과 잠을 내쫓았으니 당장은 소풍 중 호우와 같아 불유쾌가 자동이다. 이는 나이가 먹어 직수굿해지더라도 변치 않을 나의 조건반사일 것이 불가항력하다.     


 킥으로 돌연 꿈에서 깨면 분명 남쪽에 두고 잔 머리가 북쪽에 간 듯 공감각이 일그러진다. 에라, 신체는 또 가관이다. 그곳의 경험은 이곳의 경험이 되어 총에 맞았는지 가슴이 뚫려있고 하늘을 날았는지 피부가 차가우며 누구를 만났길래 뜬 눈은 화구호일까. 아직 몸이 꿈나라와 이 나라의 판문점에 있다. 환상의 나라 정령들이 미처 킥에 대비 못해 내 몸에 붙어 이곳까지 함께 소환당한 탓이려니. 섣불리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발을 내디뎠다간 도끼와 장작의 관계가 내 머리와 책장이 될라. 그저 가만히 누워 뚫린 가슴을 보수하고 눈에 고인 물을 닦으면서 정령들이 있으면 안 될 곳까지 온 양 허겁지겁 그네들 세상으로 날아가기를 기다려주면 된다. 비로소 그들이 발 돋고 날았는지 발자국이 부푸는데, 꿈 깨고 양팔에 피는 닭살이다. 다시 정면을 응시하자 이제야 천장지에 무수한 강줄기가 권태롭게 흐르고 신생아처럼 머리통을 베개에 굴려보니 확실히 남쪽이다. 지구로 무사 귀환하는 우주인이 매일 낮이다.     


 악몽만 아니라면 나는 미완성 꿈일지라도 기록해 둔다. 그러나 기록이라 부르기 객쩍은 것이 문장이 도통 두세 줄을 넘지 못한다. 「오늘 낮, 식인종이 침대 옆 창문으로 쳐들어왔다. 칼로 창문을 깨더니 발부터 넘겼다. 그때 꿈이 무너졌다. 나는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왜 쳐들어 왔지? 기억을 찾을 수 없다.」 메모장에 이런 약소하고 뭉술한 기록의 습작만 여럿이다. 꿈의 막후가 기억나지 않는 건 앞서 쓴, 꿈의 전개 중 현실 복귀를 당해 그 자체가 결말에 이르지 못한 탓이겠고, 막전의 실종은 꿈나라 정령들이 날아가며 내 꿈 기억까지 회수해갔으리라 의심할 따름이다. 깨어나면 꿈꾼 자의 꿈을 회수해 오라—그 나라 어명인가. 그 일화가 생각난다. 폴 매카트니가 꿈에서 멜로디를 듣고 일어나서 그것을 기록했더니 <Yesterday>가 완성되었더라는. 혹 나였다? 깨어나 기록하려 들면 악보의 두 줄도 못 써 머리를 박박 긁으며 나의 몹쓸 기억력을 탓함으로 마칠 일이다. 어쩌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소 명운은 주인장의 해석능력이 아니라, 고객이 꿈의 기억을 얼마나 잘 보존되게 가져오느냐에 달린 것은 아닐는지.     


 오늘 낮에도 누워 꿈을 꾸었다. 꿈은 낮만큼 따분하지 않아 좋다. 나에게 그것은 6살 아이가 가슴에 품는 공룡의 존재와 같다. 잠을 자면서 액션, 공포, SF,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 장르 불문에 흥미 보장의 서사를 경험하고 깨어나선 연기처럼 그 꿈을 쥘 수 없다는 사실이 어릴 적의 공룡만큼 무척 신비롭고 알쏭달쏭한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과학적으로 답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꿈의 많은 영역이 미지로 남아있음은 나의 오래된 안심이다. 아마존 숲을 다 벌목한다면야 완벽한 지도를 그릴 수 있겠지만 더이상 그곳이 탐험소설의 소재로 쓰이긴 어려울 것이다. 나는 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장에 선다. 후에 과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룩해내 기어코 과학교과서에 「꿈은 OO와 OO의 연쇄작용임이 밝혀졌다!」 같은 문장이 실린다면, 가려운 곳을 긁어준 느낌보단 꿈에 대한 나의 순수함과 신비로움을 과학이 빼앗아갔다는 허전함이 클 것이다. 과학이 꿈을 완벽히 정의하는 날이 온다면 수백 년 논란인 장주와 나비의 관계도 과학적 해답으로 종결될 것이고 그날부로 <인셉션>이나 <바닐라 스카이> 같은 명작의 개봉은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가장 염려는 인간의 오랜 관습인 장래희망을 꿈으로 부르는 문화가 죽는 것이다. 영어권의 「Dreams come true」는 죽은 숙어가 되고 한국의 새 어린이들은 2002년의 붉은 카드섹션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리 물을 수 있겠다. “쌤! 꿈은 OO와 OO의 연쇄작용이라고 과학시간에 배웠잖아요. 그런데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축구랑 무슨 상관이에요?” 아아, 어머니 이건 정말 안타까울 일 아닙니까?

   

 “이 식충아. 낮에 그렇게 꿈만 꿔서 어떻게 살래!”

그러니까 어머니,

 “꿈을 지켜주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