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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smilewriter Oct 07. 2024

잃지 말아야 할 것들1

지하철 노숙인

서울역에 내려 지하철을 타기 위해 매표기에 서있는 아라에게 한 노숙인이 다가와 라면 먹으려는 데 돈이 모자란다며 몇백 원을 요구해 왔다. 아라는 이런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이 날도 약간의 돈을 지갑에서 꺼내 노숙인에게 주며 당부했다. 절대 술 사 먹지 말고 꼭 라면이나 식사할 만한 걸 드시라고. 아라가 돈을 주든 안주든 그들은 노숙인 생활을 계속하며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할 것이다. 아라가 만나는 노숙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과 호의는 술 먹지 말고 요기될 것을 사 먹으라는 말 밖에 없었다.
영하 몇 3도의 추운 겨울날씨라 두꺼운 패딩을 입은 채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누군가는 따뜻한 방한외투를 산다고 백화점이나 쇼핑센터 안에 들어가고 있었고, 누군가는 노숙인으로 보도블록 위에 어디선가 구해온 이불 하나로 겨울 추위를 버티며 구걸을 했다.
'임시보호소가 있겠지? 설마 역내에서 저분들 자는 건 아니겠지? 경찰에 연락해야 할까?‘

머리가 복잡해진 아라는 지하철 내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
맨 끝 화장실 칸에 들어갔다. 변기 뚜껑이 덮여있다. 손을 뻗어 들어 올리려고 하는 순간 변기 위에 검은색 비닐봉지 한 묶음이 보였다. 좀 전에 이 칸을 쓴 누군가가 두고 간 건가 싶어 급히 문을 열어 화장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비닐봉지를 두고 간 사람이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 비닐봉지를 들고 지하철 내를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라는 묵직해 보이는 검은 비닐봉지를 잡아 들었다. 한 손으로 잡지 못할 정도로 두툼하고 묵직했다. 예상치 못한 무게에 당황한 아라는 두 손으로 급히 낚아채듯 들었다. 두 손으로 겨우 들 정도로 제법 무거웠다.

'이게 뭐지? 설마 돈인가? 지폐 모양 다발이 잡히는 듯한데 그래도 설마 돈이겠어? 에이 말도 안 되지. 중요한 거면 굳이 꺼내놓지 않았을 텐데 큰 묶음이 여기 왜 있을까?'
들고 화장실 밖 대기실로 뛰쳐나갔다. 사람이 거의 없다. 앉아서 쉴 수 있는 테이블 두 개에 세 분의 노인들만 앉아 있었다. 그중 여자분은 한 분밖에 없었다. 아라는 그 할머니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화장실에 이거 두고 가셨어요?"
아라는 들기도 무거운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가만히 고개를 흔드는 할머니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역무원 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역무원실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니, 사람이 왜 한 명도 없지? 지하철 승객에게 무슨 일 있나? 그래도 그렇지 한 명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도 없는 곳에 검은 비닐봉지를 두고 오기가 그래서 들고 생각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대로 두고 올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거 두고 간 사람은 이유가 뭘까? 대체 왜? 지하철 화장실에 돈 같아 보이는 물건을 두고 어딜 간 걸까?'
비닐을 만지작거리다 화장실로 다시 들어갔다. 제일 끝 칸에 들어갔다.
'돈이겠지? 돈이라면 대체 얼마일까?'
호기심이 든 아라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열었다. 5만 원 묶음들이 한가득 보였다. 대충 얼마인지 살펴보았다. 얇은 묶음이 500만 원 정도로 보이니 얼핏 보아도 20묶음은 되어 보였다. 얼핏 봐도 1억 이상이었다. 아라는 검은 비닐봉지 안 물건의 정체가 큰 액수의 돈임을 알고 머리가 하얘졌다. 가짜 돈인가 싶어 한 장을 꺼내 살펴봤다. 불빛에 비춰봤다. 예전 인터넷에서 위조화폐 감별법이라는 글을 본 기억을 되살려 꼼꼼하게 살펴봤다. 위조가 아닌 진짜 5만 원권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아라는 변기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앉았다. 지금까지도 그 돈의 주인은 찾으러 오지 않았다. 이렇게 큰돈을 분실했다는 사실을 모를 리는 없을 거고 범죄에 사용된 돈이거나 돈의 주인이 큰일을 당했거나 한 것 같았다.
이런 결론에 이르자 아라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분명 범죄에 도용된 돈 같았다.
'이 돈을 경찰에 신고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하고, 공범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겠지? 경찰이 CCTV를 보고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비닐봉지를 들고 나왔는지 물으면 뭐라고 하지? 내가 사실을 말하면 그들이 믿어줄까? 중간 수거하는 이? 전달자? 뭐 그런 걸로 오해받지는 않을까? 또는 검은 비닐봉지의 주인이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돈을 경찰에 신고했다고 화가 나서 나를 쫓거나 해코지를 당하면 어쩌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이어갔다.
그대로 두고 나갈지, 그 돈을 어디에 줄 지는 선택지가 좁혀졌다. 아라는 굳게 결심했다. 아라 핸드백 속에 예비로 들고 다니던 천 시장 백을 꺼내 돈 들어있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넣었다. 그 위에 아라가 쓰고 있던 니트 목도리, 후드 넥워머를 얹고 장갑도 넣었다. 아까 노상에서 팔던 10개 5천 원짜리 묶음 양말도 넣었다. 돈이 들어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시장 가방을 다른 걸로 덮었다.

아라는 검정 후드티의 모자를 깊게 눌러쓴다. 모자 부분을 앞으로 더 빼내서 얼굴을 덮는다. 가방 안 검은색 마스크를 꺼내 썼다.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라의 얼굴은 거의 다 가려졌다. 아라는 검은색 비닐봉지가 든 시장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까 라면 먹으려는 데 돈이 모자란다며 몇백 원을 요구했던 노숙인이 있었던 곳으로 갔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현금 2천 원을 꺼내 지하철 자동발매기로 갔다. 현금을 기계에 넣고 가는 장소를 누른 후 티켓을 받았다. 그때였다. 아까 아라에게 몇백 원을 달라고 했던 노숙인이 아라에게 다시 다가왔다.
"저기요, 너무 춥고 배고파서 컵라면 하나 사 먹으려 하니 돈이 몇백 원 모자라네요. 남은 잔돈 좀 주세요."
아까 아라에게 했던 똑같은 말로 동전 몇백 원 달라고 했다. 그 노숙인은 좀 전 아라에게 같은 말로 돈 달라고 했던 사실을 기억 못 했다.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같은 말을 하며 돈을 달라고 했을까? 아라는 남은 잔돈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꼭 라면 사드셔야 해요."
"네에"
"잠시만요."
지갑 안에서 천 원짜리 몇 개를 꺼내 노숙인에게 주며 강한 말투로 말했다.
"소주 사드시면 안 돼요."
"아, 당연히 라면 먹어야죠. 고마워요."
"저 부탁 하나만 할게요. 오늘 쉼터 가시나요?"
노숙인은 돈만 줄 것이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아라를 쳐다봤다.

'뭐 어려운 부탁 하려나? 지난번 어떤 총각처럼 밥 사주고 그 대가로 통장 만들게 하려는 것 아니야? 아니면 지난번 50대 남자처럼 내 주민등록증으로 휴대전화 10개 개설하려나? 그때 그 남자는 짜도 너무 짰어. 겨우 5만 원 줬지. 나를 뭐로 보고. 꼴랑 5만 원 때문에 그 뒤 경찰이 나를 얼마나 찾고 귀찮게 하던지. 이번에는 50만 원 불러야겠어. 저 여자가 살인을 하든 사기를 치든 뭘 하는지 나야 상관없지. 부탁 들어주고 돈만 많이 받으면 그만이지. 경찰이 잡아가면 잡아가라지. 감옥에서 몇 개월 살면 밥 먹는 거 걱정 안 해도 되고 좋네, 좋아. '
"오늘 추우니 거기서 자야죠. 왜요? 나한테 다른 할 말 있어요?'
"네. 이 시장 천 바구니 쉼터 담당자나 봉사하는 선생님께 주세요. 지나가던 누가 기증했다고 전해주세요."
"직접 주면 되죠? 바로 앞인데 직접 갖다 줘요. 지하철 바로 위에 있어요. 여기서 가까워."
"저 지금 빨리 어디 가야 해서 그래요. 약속에 늦었거든요. 그리고 좋은 것도 아니고 쓰던 거 넣은 거라 기증하기 부끄럽기도 하고요. 뭐 이런 걸 기증했냐고 할 것 같기도 해요. "
"알았어요. 내가 갖다 줄게요. 몇 천 원 심부름값 받았으니 그 값을 해야지. 내가 갖다 줄게요. 간 김에 거기서 오늘 자야겠네. "
"감사합니다."
"근데 왜 이렇게 무거운가요? 돈덩이 들었능교?"
"아이고 돈이 거기 왜 있겠어요? 책 여러 권 넣어서 그래요.“
노숙인인 세상 물정 모른다는 표정으로 아라를 흘깃 쳐다봤다.
"우리 같은 사람이 누가 책 본다고. 어허. 참."
"혹시 모르죠. 볼 분이 있을걸요? 봉사자가 읽어도 읽을 거니 그냥 넣었어요."
"알았어요. 쓸모없겠지만 마음이 착하니 부탁 들어주지요."
"네. 감사합니다. 춥고 저녁 시간 다 되었는데 얼른 가세요"
"알았어요."
인사를 한 후 그가 올라가는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아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지하철 타기 위해 개표구로 향했다.
대구로 돌아온 아라는 처음에는 뉴스를 샅샅이 뒤졌다. 인터넷 뉴스, MBC, KBS, MBN, YTN, 연합뉴스 등등 뉴스란 뉴스를 다 뒤졌다. 사건 사고란에 돈을 분실한 사람이라던가, 마약이나 범죄 사건, 이름 모를 사람의 억대 기부 등이 나오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을 살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자, 아라는 지하철 검정비닐에 돈 억대 돈 사건이 기억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런 일이 꿈속에서 스쳐 지나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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