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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콩 Sep 30. 2022

일기는 꼭 하루 중 있었던 일만 써야 할까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부모님은 학창 시절 일기 쓰기가 재밌으셨나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찾는 게 힘들지 않으셨나요? 방학 때 밀린 일기를 몰아 쓸 때는 더 머리에 쥐가 나기도 했을 겁니다. 새로운 일, 특별했던 기억을 떠올리려 무척 애를 썼겠죠. 그래서 어떤 부모님은 주말마다 아이를 데리고 박물관을 가고, 체험학습을 찾아다니고, 여행을 다니신다고 합니다. 아이에게 특별한 이야깃거리를 일부러 만들어주기 위해서요.

 그런데 일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살짝 내려놓으면 사실 쓸 거리는 아주 많아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기에 대해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기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적어야 한다.’ 즉 특별한 이벤트를 적거나, 아주 인상 깊었던 어떤 일화를 반드시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새로운 ‘일’이 아닌 ‘생각’에 집중해보세요. 일기는 겪었던 일 말고, 평소 하던 생각을 적어도 됩니다. 예를 들면 ‘엄마는 왜 화를 많이 낼까?’ ‘왜 게임을 자유롭게 못 하지?’ ‘나도 강아지 키우고 싶다’ 등 평소 고민하고 사유하던 일들에 대해 적어도 충분히 좋은 일기가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평소에는 괜찮았던 친구의 말투가 그날 유독 거슬려 싸우기까지 했다면, ‘나는 왜 그 말투가 유독 거슬렸을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마음을 떠올려보고 나는 왜 그랬을까 생각하고 그 마음을 그대로 적는 것이지요. 그 자체가 훌륭한 글쓰기 활동입니다.

 저는 이런 일기 쓰기를 ‘수필식 일기 쓰기’라고 부릅니다. 평소 가지고 있던 나만의 생각을 옮겨 적는 것은 수필 쓰기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수필과 다른 점은 독자를 고려한 글쓰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읽는 사람을 생각하며 내 표현을 순화하거나 상세하게 설명하며 적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그 자체, 그 내용만을 담담히 적어내는 방식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수필식 일기 쓰기를 시도한 것은 3학년 지혜(가명)를 만났을 때입니다. 제가 일기 코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지요. 아이들을 만나 일기 쓰는 법을 가르치면서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앞서 밝힌 대로 새로운 ‘경험’이 아닌 ‘생각’에 집중해 일기를 써보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첫 시도가 지혜였는데 지혜는 차분한 성격에 이미 논술 학원을 다니고 있어 글쓰기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써왔다는 일기와 독서록을 보았는데 글밥도 제법 되고 표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대화를 나눠보니 이해력도 빠르고 기본적인 과제 수행 능력도 있어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엉덩이 힘이 꽤 있는 아이였습니다.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요.

 “지혜야. 일기를 꼭 하루의 일을 기록하는 형태로만 쓸 필요는 없어. 평소 지혜의 생각이나 느낌을 적어도 돼. 예를 들면 ‘핑크색’에 대한 생각. 나는 어릴 때 핑크색을 좋아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여자 색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더 이상 안 좋아하게 됐다. 그런데 왜 색깔에 남자 여자를 구분짓는 걸까? 그냥 좋아하면 안 되나? 뭐 이런 식으로 써보는 거지.”

 라고 이야기를 건넸는데, 지혜는 뭔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나온 작품(!)이 바로 유리컵이었습니다.

제목 : 유리컵

나는 유리컵이 무섭다. 왜냐하면 유리컵을 실수로 떨어뜨리면 깨지니깐. 그럼 종이컵으로 쓰면 되는데 한 번 쓰고 버리면 지구가 아파할 수 있다. 유리컵을 쓸 때 안 떨어뜨리려 노력하고, 진짜 안 떨어뜨리면 긴장이 풀린다. 유리컵은 투명해서 물질의 색깔이 잘 보여서 아름답고 예쁘다. 유리컵을 조심히 써야겠다!


 유리컵이 깨질까 봐 불안했던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리고 강박증처럼 유리컵을 볼 때마다 그런 느낌을 가지는 사람도 있지요. 그래서 지혜의 일기는 더 재밌고 공감이 됩니다. 지구를 생각해 종이컵을 쓰지 않겠다는 마음도, 투명한 유리컵은 내용물이 잘 보여 더 예쁘다는 생각도 모두 지혜만의 생각이 담긴 문장입니다.

 수필식 일기 쓰기는 새로운 쓸 거리를 제공하는 역할도 하지만 본인의 심연을 들여다보기에도 좋습니다. 2학년 동우(가명)와 ‘좋은 친구’를 주제로 이야기 나눴던 일이 생각납니다. 동우에게 친한 친구가 누구냐 물으니 A와 B의 이름을 말하더군요. 그 친구들이 왜 좋으냐 물었더니 자신을 편안하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상대가 어떻게 대하면 마음이 편안하냐 물으니 친절하게 대해주고 잘 대해주는 것이라 말하더군요. 그럴 때 따뜻하고 든든한 기분이 든다는 말도 했습니다.

 수필식 일기 쓰기는 아이의 생각을 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질문이 좀 집요하게 들어갑니다. 이때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데요. 바로 ‘계단식 질문하기’입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 말하기 어려워할 때 한 계단, 한 계단, 계단을 내려가듯이 질문해주면 좋습니다. 이 역시 예를 들어볼게요. 아이가 ‘나는 낯선 사람과 대화가 어렵다.’라고 말한다면 ‘왜 어렵지?’ 물어봅니다. 이 질문은 아이 스스로 할 수도 있고, 부모님이 해주실 수도 있어요. ‘불안해서.’라는 답을 얻습니다. 한 계단 내려온 것이지요. ‘왜 불안하지?’ 다시 한 계단 더 내려가는 질문을 합니다. ‘그 사람이 내 얘기를 제대로 들어줄지 몰라서.’, ‘그의 반응이 예측되지 않아서.’ 만약 이렇게 답이 나온다면 ‘아 나는 반응이 예측되지 않으면 불안하구나.’라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더 들어가 볼까요? ‘난 왜 예측되지 않으면 불안할까?’ 답으로 ‘나는 뭐든 통제할 수 있는 걸 좋아해’, 또는 ‘과거 어떤 경험으로 예측되지 않는 상황은 피하는 게 좋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 나는 통제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또는 ‘과거 그 경험이 나에게 영향을 주는구나’라고 알 수 있게 됩니다. 생각도 감정도 계단처럼 깊이, 깊이 내려가다 보면 그 근원의 무언가를 만날 수 있어요.    

 그래서 수필식 일기 쓰기는 어른에게도 좋은 글쓰기입니다. 생활하면서 마음에 걸렸던 상대의 행동이나 말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습니다. 뭔가를 선택해야 할 때 어떤 것이 더 좋은 선택인지 한번 더 걸러볼 수 있습니다. 우울하고 답답한 본인의 마음을 진지하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는 질문으로 진정한 본인의 모습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아이는 사고력이 조금 더 생긴 후에 하는 게 좋습니다. 적어도 10세 이상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1학년 아이와 해보았는데 무척 힘들어하더군요. 하지만 이런 글쓰기와 질문법에 익숙해진 아이는 사춘기 시절의 요동치는 마음을 스스로 달랠 수 있습니다. 고민도, 괴로움도 글쓰기로 달랠 수 있어요. 그러니 아이의 여건이 되고 부모님의 의지가 있으시다면 한 번쯤 시도해보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매일매일의 쳇바퀴, 매일의 반복에서 새로운 글쓰기가 필요할 때 수필식 글쓰기와 계단식 질문하기도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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