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희정(가명)이를 만났던 그즈음 저는 수필식 일기 쓰기를 아이들에게 많이 권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란 무엇일까? 그렇다면 좋은 친구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이 있으면 무엇이 달라질까?’ ‘엄마란 무엇일까? 내게 엄마는 어떤 의미인가?’ 그동안의 일기가 경험 위주의 글이었다면 수필식 일기는 생각 위주의 조금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글이지요. 아이들이 해보지 않은 글쓰기이고, 앞으로 계속 필요한 글쓰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주 시도를 해보고 있었습니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다는 희정이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학년이고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충분히 잘해 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희정이는 어려워했습니다.
그날의 주제는 ‘나에게 책이란 어떤 의미인가?’였습니다. 희정이는 틈만 나면 책을 본다고 하더군요. 책을 읽으면 늘 새로운 것을 알 수 있어 좋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됐을 때 즐겁고, 익숙한 것보다는 새로운 것에 더 흥미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저와의 대화 내용을 그대로 적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어려울 게 없었지요. 그러나 희정이는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습니다.
희정이는 평소에도 글쓰기 숙제가 어려웠다고 하더군요. 일기를 쓰거나 독서록을 쓸 때 뭘 써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희정이는 왜 이런 글을 써야 하는지 그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했던 일을 기록하고 내가 읽은 책의 내용을 기록하는 게 왜 필요한지, ‘이 글을 어디에 쓰려고?’라는 의문이 충분히 들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희정이에게 그동안 어떤 종류의 글쓰기를 해봤냐고 물어봤는데 수업 시간에 ‘주장하는 글쓰기’를 해봤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건 어땠냐고 물었더니 재밌었다고 하더군요. 퍼뜩 이 아이는 감성적인 글쓰기보다 논리적인 글쓰기가 더 어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소설이나 동화보다는 칼럼이나 논설 형태의 글이 더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저는 글쓰기 주제를 바꿨습니다. ‘나는 책이 좋다.’ 그리고 그 이유를 적자고 했습니다. 아이는 줄줄줄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희정아. 그동안 해왔던 글쓰기는 네 스타일 아니었던 것 같다. 앞으로 고학년 되면 주장하는 글쓰기를 훨씬 많이 할 텐데, 그게 이제 네 스타일이 될 거야. 앞으로 쓰는 글은 별로 어렵지 않을걸?”
희정이가 웃더군요. 희정이가 완성한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마도 희정이에게 ‘나에게 책의 의미?’ 이런 건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고, ‘책이 왜 좋은지 써라’이건 좀 의미 있게 다가갔던 모양입니다.
제목 : 나는 책이 왜 좋을까?
나는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새로운 건 신기하고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에는 새로운 것들이 많다. 역사책에는 내가 이때까지 몰랐던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해리포터에는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신비한 것들이 있다. 또 책은 휴식이다. 왜냐하면 책은 읽을수록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책이 좋다.
희정이와의 수업은 제게 독특한 기억을 남겼습니다.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는 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처럼, 논리적인 글을 쓰는 사람과 감성적인 글을 쓰는 사람은 타고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훈련을 통해 양손잡이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더 편한 쪽이 있기 마련이지요.
평소 아이가 글쓰기를 유독 힘들어하고 재미없어한다면 아이의 성향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엄마 힘들어'라고 말할 때 위로하는 표정을 짓거나 와서 안아주는 행동을 보이는 아이인가요, 아니면 '왜 힘들어? 뭘 해서 힘들어?' 이유를 찾는 아이인가요? 부모의 감성적인 호소에는 시큰둥하면서 이치에 맞는 이야기에는 잘 설득당하는 아이라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성향을 타고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아이라면 조금 어리더라도 주장하는 글쓰기를 시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의외로 글쓰기에 흥미 없던 아이가 ‘재밌다’고 느낄 수 있어요.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을 만난 격이니까요.
세상에는 아름다운 문학작품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칼럼과 논평도 분명 존재합니다. 어느 글이 더 좋고 나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가 타고난 특성 그대로의 글쓰기를 할 수 있게 돕는 것. 그것이 우리 어른들이 해줘야 할 일이지요.
그렇다면 주장하는 글쓰기는 어떻게 지도하면 좋을까요? 예를 들어 ‘게임의 중독성’에 대해 글을 쓴다고 해봅시다. 아이의 성향이 감성적이고 공감하는 쪽이라면 이런 글이 나올 겁니다. ‘내 친구가 길을 건널 때 핸드폰 게임을 하는 걸 봤습니다. 너무나 위험해 보였습니다. 게임은 어린이에게 중독의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성향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면 이런 글이 나올 겁니다. ‘어린이는 아직 통제력이 부족합니다. 게임은 너무나 자극적입니다. 그것을 아이가 스스로 통제하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아이에게는 게임을 금지해야 합니다.’ 이처럼 감성적인 아이는 경험에 빗대어 글을 쓰게 하고, 이성적인 아이는 자신의 주장에 빗대어 글을 쓰게 하면 됩니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생이 너무 귀찮고 싫을 때 이런 글을 쓸 수 있지요. ‘동생은 형을 괴롭히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형이 화가 나기 때문입니다. 집중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생을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동생은 혼자 놀아야 합니다.’ 이성적인 아이도 이런 글을 통해 자신의 마음속 앙금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문학적인 글을 쓰는 아이와 주장하는 글을 쓰는 아이는 어느 정도 타고난다는 마음으로 아이의 글쓰기를 바라봐주세요. 부모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글을 쓰더라도 생긴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