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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콩 Sep 30. 2022

아이에게 문장을 불러주라고요?

 2학년 준성이를 만났을 때, 어머님의 요구사항은 독서록 쓰기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일기는 그럭저럭 해 보겠는데 독서록은 막막하다고 하시더군요.

 “아이가 책을 제대로 안 읽어서 그런가, 줄거리도 제대로 얘기 못 하고 주인공 이름도 몰라요. 이런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독서록을 쓰죠?”

 사실 아이가 주인공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관심 밖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같이 놀아도 그 친구의 이름을 묻지 않습니다. 놀이터에서 놀 때 새로운 친구가 보여서 저 아이가 누구냐고 물어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분명 같이 신나게 놀아놓고도 말이죠. 아이가 생각할 때 놀이에서 친구의 이름은 필요하지 않은겁니다. 그냥 어떻게 놀 건지 뭐 하고 놀 건지 얘기하면 됐지, 그 친구의 이름이 궁금하지 않았던 거죠. 책 속의 주인공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으로 보거나 이야기 흐름에서 누가 주인공인지 알면 됐지, 그 주인공의 이름까지 기억할 필요는 없다고 아이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줄거리 요약은 어떨까요? 이건 어른도 힘들어 합니다. 친구나 직장 동료에게 재밌는 영화나 드라마를 추천받으신 적이 있나요? 그럴 때 ‘무슨 내용이야?’라고 물으면, 추천해준 상대는 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잘 얘기해주던가요? 이야기를 읽거나, 보거나, 전해 듣고, 다른 사람에게 그 내용을 요약해서 전해주는 것은 사실 어른도 하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많은 노력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독서록을 몇 번 써보지 않은 아이가 자신이 읽은 책 내용을 요약해서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저는 준성이에게 어떤 책으로 독서록을 써볼 건지 물어봤습니다. 아이는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책을 한 권 읽기로 했습니다. 아이 집에 있는 전집 시리즈 중에 한 권이었는데 제목은 ‘거짓말 나라’였습니다.

 한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국민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왕자와 왕비는 그런 점이 무척 싫었지요. 그래서 거짓말하지 않는 신붓감을 직접 찾기로 합니다. 왕자는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나면 ‘내 말은 아주 특별해서 은으로 된 갈대만 먹습니다’라는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어부의 딸을 만나 같은 거짓말을 했을 때 ‘이 세상에 은으로 된 갈대를 먹는 말은 없습니다’라는 답을 듣게 됩니다. 왕자는 그 여인과 결혼하고 그 나라 국민도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늘 그렇듯이 준성이에게 첫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문장을 어떻게 쓸래?”

 “거짓말 나라에는 모두가 거짓말을 해서 왕자가 신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준성이는 생각보다 내용 정리를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래 그대로 쓰자. 그리고 또 다음 문장은?”

 그런데 준성이가 머뭇거렸습니다.

 “왜? 다음 문장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자 준성이가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왜 왕비랑 결혼을 안 해요?”

 저는 무슨 소린지 몰랐습니다.

 “왕자도 거짓말을 싫어하고, 왕비도 거짓말을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둘이 결혼하면 되는데 왜 신붓감을 찾아요?”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왕비는 왕자 엄마잖아.”

 “아? 엄마예요?”

 그제야 준성이는 큰 의문을 해결한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또 한 번 ‘아이의 눈높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살지 않는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은 황제, 임금, 왕비, 왕자, 공주 같은 단어가 피부에 와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책에만 나오는 말이니까요. 저는 가족 관계도를 그리고 엄마 아빠 자리에 왕, 왕비를 적고 아들, 딸 자리에 왕자, 공주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왕자와 공주가 각각 결혼하면 그 배우자를 왕자비, 부마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려주었지요.

 이처럼 아이는 책을 읽으며 어른은 생각지도 못하는 엉뚱한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준성이가 왕비와 왕자의 관계를 헷갈린 것도 그 아이만의 시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다음 문장으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제안을 하자 준성이가 ‘어떻게요?’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군요.

 “‘그런데 나는 사실 왕자와 왕비의 관계를 몰라서 처음에는 왕비와 결혼하면 될 텐데 왜 안 할까 생각했었다.’ 이렇게 적으면 어때?”

 아이가 막막해할 때 문장을 만들어주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아이들에게는 모방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그럴싸한 문장을 만들어주면 아이는 그것을 모방해 자신만의 언어로 바꿉니다. 예를 들면 ‘나는 왜 왕자가 왕비랑 결혼 안 하지 했다’ 라든가 ‘왕비가 엄만 줄 몰랐다’ 등의 말을 만듭니다. 어른이 불러주면 그대로 쓸까 봐 걱정이 되지만, 놀랍게도 아이들은 불러준 대로 쓰는 것에 강한 저항감을 보입니다. 마치 받아쓰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일까요? 제가 만나본 아이의 대부분은 토씨라도 자기 식대로 바꿔야 직성이 풀리지 그렇지 않은 아이는 없었습니다.

 아무튼 준성이는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왕자와 왕비의 관계를 몰랐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 문장은 쓰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준성이의 의견을 존중해줬습니다.

 “그럼 다음 문장은 뭐라고 쓸까?”

 “그래서 왕자가 거짓말을 해서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알아가지고, 진짜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결혼해서 거짓말이 사라졌어요.”

  준성이는 그다음 문장을 후루룩 말했습니다. 이 경우 방향은 제대로 잡고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순서에 맞춰 얘기하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여러 문장으로 나누어 주면 훨씬 자연스러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준성이의 말을 빌려 문장을 나누어 봤습니다.

 “‘그래서 왕자가 거짓말을 해서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알아냈다. 그리고 진짜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을 만났다. 왕자는 그 여인과 결혼했고, 거짓말 나라에는 거짓말이 사라졌다.’ 이렇게 나눠서 적어보면 어때? 훨씬 이해하기 쉬울 것 같은데?”

 아이는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문장을 불러주었지요. 이 경우엔 아이가 문장을 그대로 받아 적습니다. 그 문장이 본인이 만든 문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글을 쓸 때 옆에서 문장을 불러주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아이는 글을 쓸 때 맞춤법도 생각하고, 띄어쓰기도 생각하고, 글씨 모양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 써야 될 문장을 자꾸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컴퓨터 서버처럼 어른은 아이의 문장을 머금고 있다가 아이가 필요할 때 불러줍니다. 아이는 저장창고처럼 어른을 활용하며 글쓰기를 이어갑니다. 글쓰기의 부담이 훨씬 줄어들게 되는 것이지요. 이때 문장을 어른의 입맛과 생각에 맞게 고치면 안 됩니다. 처음 아이가 저장한 그 단어, 그 토씨 그대로 불러줘야 합니다. 조금 달라지면 아이는 금세 알아차리고 받아 쓰던 것을 멈춥니다. 작가는 누구든지 자신의 문장을 금방 알아보는 법입니다.

 저는 준성이가 만든 문장 속에 ‘마침내’라는 단어를 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준성이에게 물어봤지요.

 “‘그리고 진짜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을 만났다’라는 문장을 쓸 때 말이야. 선생님은 ‘마침내’라는 말을 쓰면 아주 오래 걸려서 그 여인을 만났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 좋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혹시 ‘마침내’라는 말 알아?”

 준성이가 그 단어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저는 바로 휴대전화에 ‘마침내’를 검색해 뜻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침내’는 ‘드디어 마지막에는’이라는 뜻이라고 나왔습니다. 아이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없었지요. 만약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가 있으면 풀어서 설명해주고 아이에게 그 단어를 쓸지 말지 결정하게 합니다. 준성이가 그 단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문장을 ‘그리고 마침내 진짜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을 만났다’라고 쓰기로 했습니다.

 이곳에 준성이의 독서록을 옮겨놓아 보겠습니다.

거짓말 나라에는 모두가 거짓말을 해서 왕자가 신붓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자가 거짓말을 해서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구분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진짜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한 후로 이 나라는 거짓말이 사라졌다. 나도 거짓말과 화내는 걸 싫어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거짓말이 없어진 저 나라에서 살고 싶다.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귀찮다. 왜냐하면 진짜인지 아닌지 내가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짜와 거짓말을 ‘구분해냈다’는 표현도 ‘마침내’처럼 준성이에게 알려주고 고르게 한 단어였습니다. 글 후반부에 자신의 생각을 적은 것도 아이에게 알려주어 형식을 맞춘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저는 ‘거짓말 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귀찮다’는 저 표현을 꼭 넣고 싶었습니다. 사실 글은 이미 마무리되었고 그 뒤에 저 문장을 넣으면 글의 완성도가 떨어지지만, 준성이만의 시선이 담긴 말이라 꼭 넣어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준성이와 책을 다 읽고 대화를 나눌 때 거짓말하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준성이가 ‘귀찮다’고 대답을 하더군요. 왜 그러냐 했더니

 “그러면 내가 또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하잖아요.”

 하더군요.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싫다, 나쁘다, 만나고 싶지 않다’ 정도의 답이 나왔을 텐데 ‘귀찮다’라는 그 표현이 너무나 신선했습니다. 이유도 너무 타당하지 않나요? 진짜인지 아닌지 매번 검증해야 하니 얼마나 귀찮겠습니까.

 그렇게 완성된 준성이의 독서록은 무려 15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내 주신 숙제는 5줄 이상 쓰기였는데, 무려 15줄을 쓴 겁니다. 아이가 뿌듯해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지요.

 준성이 어머니와는 아이가 제법 이야기의 줄거리를 잘 요약하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쩌면 어머니의 기대치가 높아서 준성이의 모습을 제대로 못 보신 건 아닌지 우려가 되더군요. 정말 깊이 사랑해서, 아이가 잘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부모님은 아이들을 자꾸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됩니다. 저 역시 우리 아이를 바라볼 때 그런 마음이 드는걸요.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아이를 믿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는데, 우리 부모들에게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역량껏 잘 살아가고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이에게 글쓰기 지도를 하실 때도 근거 없는 믿음으로 믿어주세요. 아이가 말한 문장이나 표현을 고치지 말고 그대로 품고 있다가 아이가 글을 쓸 때 불러주세요. 글 쓰는 아이 옆에서 우리 어른들이 해줄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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