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나는 알코올중독자였다. <조색기> 서두에서도 그렇게 시작한다. 나의 알콜력은 2008년부터 시작해서 2017년 무렵 끝났다. 술을 끊다시피 한 것은 자의로 끊은 건 아니고 무슨 병이 생긴 것도 아니고 그저 술이 생각나지 않으며 자연히 종결된 것이었다. 그래서 주위의 알코올 중독들이 어떻게 했냐? 라는 말을 들어도 딱히 설명할 거리가 없어서 저절로 그리 됐다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 시절 나는 무척 화려한 이력을 가졌다. 앉아서 10L의 맥주도 거뜬했고, 술을 먹고 수업을 듣기도 부지기수였으며 언젠가는 술을 갖고 뒷자리에 앉아 술 먹으며 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 돌아보면 죄다 치기어린 취기이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선생과 애들의 단체 술자리에서 백만원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어떤 선생은 학생 때는 잘 먹어야 한다며 맨날 돼지 갈비집에 데려갔다. 수업이 끝나면 무리지어 늘 가던 곳으로 갔는데 1학년 때는 <뻐꾸기 집>에 매일 갔거나 가끔은 막걸리를 먹으러 <향촌>에 갔고 때로는 생맥주를 먹으러, 그리고 그곳에서 알바하는 친구를 보러 <서른즈음에>를 갔다. 나는 늘 가는 술집 <대포>에서 간단한 국수와 카스2병을 먹는 걸로 언제나 저녁을 대신했다. 가끔은 당시 연애하던 사람과 그 집의 카스가 동날 때까지 마시곤 했다. 하숙집 앞의 아무도 안 가는 곳에서 간단히 맥주 2000을 먹는 걸로 요기를 대신하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바뀌다시피 했을 것이다. 나는 노는 무리가 세 번 바뀌었는데 하나는 운동권이었고 하나는 총학선거를 준비하고 우박의 수업을 듣던 친구들이고 다음이 총여사람들이었다. 무리가 달랐던 내 친구들이 어느날 공통된 하나의 수업을 들으면서 서로 친해졌다. 그렇게 되기 조금 더 전에 반 선배가 알바했던 <더빠>가 이상하게도 새 무리의 아지트가 되었다. 그곳에서 마신 술을 모으면 거대한 못이 될 것이고, 피운 담배를 따져보면 비구름도 만들 기세였다. 그 밑에는 <노래하는 사람들>이란 오래된 술집이 있는데 더빠 사장이 젊었을 적 그 술집에서 놀았다고 한다. 나는 술에 취하면 아무 종이를 가져다가 그 사람 얼굴을 그려주는 버릇이 있는데 우리의 다른 아지트 중 하나인 곳에서 외국인 무리를 만나 기분이 양껏 좋아져 아무 종이에 대고 그 일행을 흔쾌히 그려주었는데 알고보니 그게 조색기의 전신인 <조롱이>의 원화 중 몇장이어서 나중에 욕을 먹은 적이 있다.(함부로 굴리지 말라고) 술을 먹으면 나는 정말 달필이 되어서 그 짓을 오끼나와에서도 했다. 펼쳐진 중국 친구의 일기 화첩에 앉은 순서대로 열 두명이 그려지니 처음엔 그냥 두고 있었던 이들도 구경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이런 일화는 자못 즐겁기나하지 술에 거나하게 취한 나는 대개 꼴불견이라서 시정잡배처럼 굴어쌓고 그리고 특제 주사위(직접 도기로 구웠고, 6면중 1234만 숫자고 남은 면엔 술, 담배가 적혀있다)를 돌리며 사람 속 얘기를 꺼내게 하는 재주나 있었다. 요행히 술 글자가 나오면 한 잔 마시면 되고, 담배가 나오면 일행 모두 한대 피우는 주사위였다.
목수 일 하면서도 술 깨나 먹었던 것 같다. 물론 아주 많이 마시는 날은 모든 납품이나 일이 끝나는 날이고 그 전에는 '간단' 하게 마셔야 다음날의 정교한 일을 해낼 수 있으니까 자제했다. 그래서 우리가 제주도에 가서 폭발했는데 나랑 (진짜)목수 아저씨랑 마지막까지 남았다. 우리는 부족한 술을 사러 삼거리 수퍼까지 가는데 도중에 신이 끊어져서 맨발로 갔던 것 같다. 즐비한 맥주캔 사이 다시 즐비한 맥주를 늘어놓고 제주의 광풍을 맞으며 아저씨의 해외 떠돌이 얘기 같은 걸 들었다. 아주 나중에, 그러니까 방금 생각났는데 목공하는 사이로 만난 사람들은 한 번도 내 연애나 관계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그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 마치 내가 일하며 입는 '거지 옷'에 페인트가 묻어도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그 '거지꼴'을 하고 마포에서 이름난 고급 참치집에 가서, "저희가 소짜 시킬 거 같아요? 중짜 시킬 것 같아요?" 하고 능청을 부리던 것처럼. 생각해보면 모두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학생운동으로 이른바 '학교'에도 가보고 목공하다가 손가락도 잘려본 사람. 나이 서른에 광고회사에서 대박을 터뜨려 업계의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모두 버리고 인도로 가버렸던 사람, 아주 이름난 스님을 10년인가 보좌해온 사람. 우리가 서로에 대해 말했던 순간이 있는가? 없다. 떠오르는 장면은 각기 일을 하거나, 점심으로 먹었던 칼국수집, 밥집, 커피를 내려 마실 때, 기계 사용법을 배울 때. 아니다. 우린 말을 아주 많이 했다. 취미생활에 대해서, 기분 좋은 일에 관해서, 간식을 먹으며, 거들어야 하는 일을 하면서, 기계우동집이나 동방미식성에 대해, 그렇지만 서로 먼저 말하지 않은 주제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유럽에서도 아주 많은 술을 먹었는데, 매일 하나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다녀오며 마트에 와인을 골라서 1유로 짜리 빵이랑 먹었다. 비스트로에 갈 재력은 없었기 때문에. 한 번은 어울리게 된 남자 중 하나가 마트의 와인을 사들고 비스트로 앞 갸르송에게 그걸 따달라고 부탁하는 걸 보았다. 그는 선뜻 따주었는데 그 와인 오프너를 그렇게 쓰는지 그때 처음 배웠다. 그는 마치 정교한 자명종이라도 된 것처럼 착착 따주었고 우리는 그걸 서로 나누어 마시며 더러운 세느강변을 걸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당시 지하철은 새벽 2시까지 다녔어도 술 파는 수퍼들은 드물어서 관광객이 몰리는 거리마다 몇몇 사람들이 맥주를 짝으로 사다가 사람들에게 1유로씩 주고 팔았다. 우리는 그 미지근한 맥주를 마시며 바르셀로나 제일의 게이 거리에 갔다. 술을 구하기 어려운 곳은 단연 이스탄불이었는데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는 것에 눈총을 표할 뿐더러 술 파는 가게들은 무슨 전당포처럼 생겼고 이름도 모를 맥주를 건네고 돈을 거칠게 받았다. 그 호스텔은 하루 5유로짜리였는데 대체 몇 번을 우렸을 지 모르는 너절한 사과차와(셀프) 터키식 융단이긴 한데 분명 나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아 보이는 것이 깔린 곳이었고 허름한 아파트를 개조해 만든 곳이었으며 내가 갔을 때에는 주인의 남친인 터키인이 시멘트를 지고 5층까지 올랕와 테라스를 수리하고 있었다. 그곳엔 딱 봐도 인도 구루로 보이는 할배(자이나교인지 시크교도인지 하여간 종교인이었다)와 세계 여행을 떠나려 인도를 거쳐가려는 애새끼(알고보니 동갑이었다)가 기차 노선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고, 러시아에서 왔다는 과묵한 청년이 제 팔뚝만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으며 아프리카에 가려고 황열병 예방주사를 맞았다가 부작용에 걸린 일본인 커플이 울고 있었다. 독일 애도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는 독일 출신이라는 점으로 무지 놀림을 받고 있었다. 주인은 호주 출신 여자로 내 유로화를 리라로 환전해주었고 그 과정동안 바퀴벌레가 한 세 마리는 지나갔다. 그리고 그날 밤 화장실 상수도가 터졌다.
우리가 별 짓을 해도 안됐고 주인에게 전화를 했는데 주인은 다른 곳에 살고 있다. 별 수 없이 애새끼가 영상통화를 연결해서 어찌저찌 해결하니 새벽 두 시였다. 우리는 웃었다. 혼성 도미토리였는데 내무반이 따로 없었다. 내무반이 나을 것이다. 적어도 2층침대들을 한 줄로 연결해놓진 않았을 테니까.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잤다. 다음날 머리를 감는데 머리에서 바퀴벌레가 나왔다. 이미 나는 휴지 없이 “당신의 ass를 닦을 땐 이 호스를 사용하세요” 라는 안내문을 보고 포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든 게 웃겼을 뿐이다. 아야 소피아를 다녀오고 바퀴벌레 라운지에서 노트를 적으며 시간을 때우는 내게 이번엔 폴란드 애들 다섯명이 몰려왔다. 여기선 술을 어떻게 구해? 글쎄…. 그들은 알라신이여 아타튀르크여 우리에게 보드카를 한 병만 내려주세요 하고 울부짖었다. 누가 들어줬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저녁무렵 술을 구해왔고 보드카라기엔 비눗물에 가까웠는데 그것도 기꺼워하며 마셨다. 나랑 애새끼(스코틀랜드 출신이므로 스코티쉬라고 하자)는 알려준 그 집으로 달려가 닫혀가는 셔터를 붙잡고 사정하며 맥주를 사왔다. 자연히 일곱이 어우러져 놀았다. 그 당시 폴란드 대통령 및 여러 의원들이 비행기 사고로 불의에 사망한 일이 있어서 술이 들어간 그들은 정치 얘기를 했다. 술이 얼근하게 들어간 스코티쉬가 말했다. “너 나랑 좀 더 돌아다닐래?” 마찬가지로 술 취한 나는 조금 고민했다. 그간의 남자 일행은 다 게이였으니까. “동전 던져서 앞면 나오면” 동전은 앞면이 나왔고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너랑 섹스하자는 얘기 아닌 거 알지?” “당연하지” 우리는 함께 전당포 맥주를 몸을 던져 사수한 동료였으니까. 다음날엔 우스운 몰골의 런던 애 둘이 왔다. 자전거를 타고 왔다고 했다. 대체 이 호스텔엔 기묘한 인간들만 오는건가? 이 바퀴벌레집이 뭐가 좋다고. 그리고 오자마자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았다 나온 주제에 멀끔한 얼굴로 인사를 하는(물론 사람들은 다들 토일렛 보이라고 놀렸다) 친구도 얘기 한 마디에 우리의 작당 동료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바로 짐을 정리해서 남부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토일렛은 아이리쉬였고 스코티쉬도 어쨌든 자기들 사이에도 지들의 모국어로 말하면 못알아듣는 간극을 바로 느끼고 기왕지사 나에게 맞춰 느릿한 영어로 말했다. 우리는 10시간인가 버스를 탔고 버스는 배도 탔고 사실 이제는 유럽여행 노트를 잃어버려 어느 도시로 간지 모르겠는데 굉장히 시골이었고 선명한 주황 기와를 얹은 낮은 집들 사이에서 올리브 나무들의 올리브가 싱싱했고 우리는 한적한 거리를 걷다 축구하는 애들과 어울려 놀고 저녁을 먹으며 아타튀르크의 사진을 걸어놓은 것에 불평하는 백인놈들의 투정을 듣다가 맥주를 사다 옥상에서 대추를 던지며 술을 마셨다. 이미 우리는 꽤 취했는데 술이 더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이 작은 요양원같은 숙소는 일정 시간이 되면 문을 잠갔기에 우리는 담을 넘어 가기로 했다. 제일 가벼운 내가 내려갔는데 발이 닿지 않아 그 다음인(이 둘은 모두 190센티였다) 토일렛이 내려가는 순간 기와가 와장창 깽창 하는 소리가 나서 우리는 날다람쥐라도 되듯이 침실로 날아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자는 척을 했다. 그가 나중에 물어줬던가 했을 것이다. 그 뒤로도 우리는 매표소에서 요금을 내기 싫다는 이유로 꾸역꾸역 어느 친절한 가난한 여행자가 남긴 ‘무료 길’을 기어올라가 고대로마유적으로 보았고, 가끔은 그런 꼼수가 없는 곳에서 경비원에게 “지금 우리가 표를 사서 들어가면 당신은 한 푼도 받지 못하지만 당신이 우리를 봐준다면 기꺼이 당신의 셔츠 앞주머니에 20리라를 꽂아줄게요” 같은 멘트를 날리다가 매표소에서 야! 하고 소리 질러서 도망간 적도 있고, 사람이 많은 해변을 피해 산을 오르고 올라 찾아낸 한 6미터 쯤 되는 절벽에서 뛰어내리며 다이빙을 했는데 그러다가 “리단 너 왜이렇게 가까이 뛰어 그러다 죽어” 하고 어께를 덜컥 잡혔던 기억이 있고…. 누가 봐도 휴양용 방갈로와 칵테일바가 있는 곳으로 숙소가 잡히고 계약 싸인을 하고 나서 셋다 곰곰히 “이건 아니지?” 하고 짐을 들고 도망가면서 “근데 너 진짜 이름 적었어?” “당연히 아니지!” “너는?” “‘리’ 라는 이름은 씨발 수천만명은 될 거다” 하고 거리로 나가 아무 숙소로 전화를 걸어 잡았는데 우리를 마중온 차가 50년대산 지프차였던 기억…. 3리라짜리 근사한 닭구이를 하나씩 사서 커다란 터키 빵과 맥주와 먹었던 것. 다음 도시는 이즈미르였는데 토일렛은 이곳을 기점으로 자신은 다른 사람과 일정을 잡았다며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했다. 이즈미르는 도회지였고 우리는 주로 시장에 나가 식사를 하고 케밥을 먹고 커피점이 사기라고 하고 2층 숙소에서 세살배기 애가 장난감 자전거를 밀고 가는 것을 보았다. 토일렛을 보내고 나랑 스코티쉬는 다시 이스탄불의 바퀴벌레 숙소로 돌아왔다. 독일애랑 러시아 애는 여전히 머물고 있었다. 러시아 애는 무슨 인터넷을 하러 온 사람처럼 하루종일 숙소에 있었고. 오늘이 ‘리’ 의 마지막 날이니까 다같이 술을 마시러 가자고 했다. 누가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젊은이들이 빼곡한 클럽 거리였다. 난 한 푼 두 푼 줍듯 술을 마셨고 키가 크지 않고 꼬실 여자도 없으니 섞여서 춤출 이유도 없었다. 밖에서 발을 달랑거리며 담배를 피우는 나를 보고 스코티쉬는 말했다. “있잖아. 리. 난 네 비밀을 알아.” 나는 웃었다. “나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