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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돌 Jun 26. 2024

영어가 좋아

[보돌에 관하여]

나는 외국어 공부하기를 좋아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만났을 때 영어 회화가 가능해야 결혼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어른이 돼서 어떻게 만나는 것인가가 문제지, 만나기만 하면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어에 진심이었다. 국민학교 때 동네 보습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딱히 기본기를 다지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 흘러 중1이 끝나고 중2로 올라가는 겨울 방학이었다. 당시, 방학 때 다이어트를 한다고 저녁 먹고 집 앞 놀이터에서 줄넘기를 하고 들어오는 것이 루틴이었다. 볼이 빨개져서 집에 들어왔는데 거실에 모르는 언니가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엄마가 “윗집 사는 지현언니다. 이제 영어 가르쳐 주신대.”라고 소개해 줬다.      


 당시 다니던 영어학원에서 아침식사를 쓰라고 했는데, breakfast가 얼추 기억은 났는지, blackfirst라고 썼었다. 영어 실력이 이 수준이었다는 말씀. 엄마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는지 학원을 끊고 과외를 받게 되었다. 자식 교육에 열혈인 분이 아니셨는데 무슨 일인가. 윗집 사는 아주머니랑 얘기하다가, 그 집 딸이 고대 영문과를 다니며, 지금 중등 교원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보돌이 영어 좀 가르쳐달라고 진행됐다는 말씀.     


 지현언니는 재밌으면서도 매우 엄격한 스승이셨다. 특히 무조건 단어를 많이 외어야 한다는 지론 하에, 30일 완성 단어집을 10 회독은 시켰다. day1. 단어 20개 중에 단어시험 봐서 틀린 것은 형광펜으로 칠하고, day2. 단어 새로 외우면 day1 형광펜 쳤던 단어도 포함해서 테스트를 받았다. 새로운 단어 틀리면 덜 혼났는데, 틀렸던 것 또 틀리면 자로 손등을 맞았다. 단어뿐 아니라, 문제집도 양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 숙제 내주면 무조건 해가야 했다. 핑계도 변명도 필요 없다. 언니가 공부를 했는데 틀릴 수는 있어도, 처음부터 뺀질거리는 태도는 봐줄 수 없다고 했다. 방학 때 강릉 외갓집에 갈 때도 영어 문제집만은 싸들고 가서 숙제를 했다. 안 그랬다가는 죽음뿐.     


 중학교 2학년 시작부터 중학교 3학년 졸업까지 꼬박 2년 동안 같이 영어공부를 했었다. 언니가 임용시험 합격과 결혼을 하면서 일산으로 이사를 가서 과외는 끝나게 되었다. 무섭기도 했지만, 시험 끝나면 잠실에 데려가서 영화도 보여주고, 대학가에 있는 푹신한 소파가 있는 카페에 가서 파르페도 사주고. 사촌 언니처럼 친근해서 잘 따르며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다. 이후로는 영어는 항상 자신 있는 과목이 되었다. 언어를 처음 배울 때는 무조건 물량공세로 밀어 붙어야 한다는 것도 언니와 공부하며 체감했다고나 할까.     


 대학교 때는 시험 응모를 위해서 텝스 점수를 제출해야 할 일이 있었다. 기억에 800점이 넘어야 했는데, 텝스는 토익보다 어려워서 점수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 시험 봤을 때가 700점대였다. 한 달 뒤에 시험을 보기 전까지 내가 한 일이라고는, 문제집을 풀면서 온스타일 채널을 하루에 5시간씩 봤던 것이다. 예전에 온스타일이라는 채널이 있었는데, 여기서 할리우드 가십에서부터 미드 시리즈까지 하루 종일 줄줄이 영어만 들을 수 있었다. 마침 방학 때여서, 문제집 풀다가 지겨우면 소파에 누워서 온스타일만 봤다. ‘길모어걸스’ 한창 재밌게 봤던 기억. 이때는 유튜브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고요. 역설적으로 손쉽게 접하기가 어려워서 더 재밌게 봤던 것 같기도 하다. 방영시간 놓치면 재방송 시간 체크해서 티브이 앞에 붙어 앉아있어야 했었다. 하여간, 그렇게 한 달 동안 영어 채널만 봤더니 텝스 점수가 100점이 뛰어서 800점대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텝스 점수가 필요했던 시험 자체는 결국 불합격했지만, 이때 영어 점수를 올리면서 생각했던 것이 역시 물량공세. 중학교 때 지현언니가 단어를 외우라고 쏟아부었던 것이, 하루에 몇 시간씩 줄곧 미드를 시청했던 것이 결국 효과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공부든지 초반에는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무조건 외우라고 하는 말이 정답이구만.     


 읽기랑 듣기는 뭐 어느 정도라고 해도, 쓰기와 말하기는 아직도 고전하고 있다. 일어는 한국어와 어순이 같으니까 문장 구성에 큰 어려움이 없다. 영어는 머릿속에서 문장을 만들려고 하는 순간부터 버퍼링이 걸리니까 이 과정 없이 스트레이트로 영작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데. 이를 위해서는, 또 무작정 외워야 한다고 유튜브의 많은 영어선생님들이 말씀하셨다. 작년에, 알바몬에서 한국어-영어-일어 통역을 한 달 동안 구하는 아르바이트를 발견. 면접을 갔었는데, 일어 면접이야 문제없었지만, 영어 면접에서 꽝이었다. 식은땀나도록 창피함을 느끼고 집에 돌아왔다. 그래, 내가 스피킹이 안 되는 것은 공부를 안 했기 때문이다. 반성합니다. 영어도 잘하고, 일어도 잘하고, 한국어도 잘하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일본어를 할 때는 머릿속의 회로가 일본어로 세팅이 되기 때문에 혼잣말도 일본어, 뇌 내 망상도 일본어로 하고는 했는데. 일본어 하다가 한국어로는 스위치가 쉬워도. 일본어 하다가 영어 하다가 이게 될라나 허참. 거참. 저는 공부를 안 해 봐서 모르겠고요. 똑똑한 사람들은 잘하더군요.     


 호주 시드니에 3개월 거주했을 때는, 한국인 셰어 하우스에 살면서, 일본인 가게에서 알바를 했으므로 영어를 자주 쓸 기회가 없었다. 슈퍼에 가도 계산대도 키오스크여서 한마디도 안 해도 됐고요. 레스토랑에 간다고 해도,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가리키며 this and this 만 연발하면 될 일. 영어 문화권에만 가면 영어실력이 늘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던 걸로. 영미권에 있던, 한국에 있던 요즘에는 유튜브 보면서 공부하면 될 것 같다. 좋은 콘텐츠들이 진짜 많다. 일본에서 토익 공부 할 때도 유튜브에서 박혜원 선생님 강의 보면서 점수 땄었다. 영어 공부는 결국 나의 의지라는 결론이 나는군요. 의지는 어디에서 얼마에 파나요.     


 2년 전에 종로 YBM에서 설연의 선생님 수업을 들었던 시간도 즐거웠었다. 일을 쉬고 있을 때여서 정기적으로 어딘가에 나가야 할 것 같아서 등록했었다. 매주 화, 목 종로에 가면서 수업 전에 광화문 교보에 가서 책도 보고 FOURB에 가서 베이글도 먹고. 종각에 있는 오우야 에스프레소 바에 가서 커피 마시고, 영풍문고 무인양품 가서 신상품 체크하는 것도 큰 재미. 백수 시절에는 일상이 늘어지기 마련이라, 이런 루틴이 필요했다. 나는 강남은 별로 안 좋아하고, 광화문이나 안국 쪽을 좋아해서 일부러 종로 지점을 택했는데 좋은 선택이었다. 선생님 강의는 실생활에 쓰이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다양한 문장으로 활용하게 해 주셨다. 그리고 이렇게 외운 문장으로 프리토킹을 시키셨는데, 이 시간만 되면 또 꿀 먹은 벙어리. 이 울렁증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툭하고 치면 줄줄 나올 만큼 반복해서 외우라고 앞에서 말했잖아.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지만, 업무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실력을 키울 큰 계기도 없는 것이 현재의 상태. 사촌언니인 지원언니는 형부가 주재원으로 미국에 갔을 때 현지에서 TESOL 자격증을 따서, 지금 제2의 직업으로 영어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언니도 마흔이 훌쩍 넘어서 해 낸 일인데. 나도 앞으로 어떨지 모르지. 이름에 ‘지’가 들어가면 영어를 잘하나!? 지현언니. 지원언니. 또 다른 언니 이야기. 예전에 알고 지냈던 언니가, 해외 무역 일을 했는데, 언젠가 같이 식사를 할 때 외국 바이어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나는 발음이 좀 더 좋아야 하고, 문장 구성이 완벽해야 스피킹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언니는 거리낌 없이 영어마저 경상도 사투리 톤으로 구수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 아닌가. 언니의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아. 그냥 하면 되는구나.’ 박나래가 “비키니는 기세다.”라고 했던 것처럼 역시 영어 회화도 기세다. 이렇게 고민할 시간에 그냥 한 글자라도 더 외워보면 어떨까. 아까부터 같은 얘기 하는 것 같아서 이제 손가락이 민망해진다. 업무적으로 필요가 있던 없던, 치매 예방을 위해서라도 영어 공부는 평생의 숙제로 가지고 가보려고 한다. 왜냐면, 재밌잖아요.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때 주요 키워드가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세 가지로 추려 보면 1. 여행 2. 외국어 공부 3. 책. 이 정도가 아닐까 싶네. 남은 인생에서는 4. 재테크 5. 운동을 추가하고 싶다. 6. 고양이 7. 가족. 아니 가족이 7번에야 나오다니. 순위를 매기다가 가족이 7번에 나오는 것을 보고 지금 놀랐다. 내 무의식이 이렇구나. 현재 충격받고 있는 ing. 외국 생활이 길어져서 이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개인주의자라 외국 생활이 길어졌던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갑자기 존재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아아. 오늘도 글의 마무리는 삼천포로 빠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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