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돌에 관하여]
엄마의 고향 친구인 남순이 이모는 일본인과 결혼을 해서 오사카에 살고 계셨다. 일 년에 한 번씩 서울에 와서는 우리 집에 며칠씩 머물고는 하셨다. 오빠한테는 뭐를 사다 줬는지 기억이 안 나고, 나에게는 산리오 문구 용품이나 과자를 사다 주셨다. 어렸을 때부터 귀엽고 예쁜 것을 좋아했던 나는, 나중에 커서 오사카 이모네 놀러 가면 귀여운 것들 한가득 사 와야지라고 생각했었다. 둔촌동 종합상가에서 산리오 제품들을 팔기는 했었는데, 가격이 비싸서 어쩌다 한 번씩 헬로키티 연필이나 사 오는 정도였다. 중학교 때는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에서 일본 사춘기 여학생의 일상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으로 일본어 공부를 했었다. 이때 히라가나는 외워서 뜻은 몰라도 읽을 수는 있는 수준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일본 가수와 드라마를 좋아했었다. 라떼는 말이야.. 일본 쇼프로나 드라마를 비디오테이프에 복사해서 파는 사람들이 있어서, 친구들이랑 돈 모아서 테이프 사서 돌려보고, 다시 다른 사람들한테 되팔았다. 천리안이나 나우누리 동호회에서 사고팔고 그랬다. 잡지는 교보문고 일본 서적 코너 가서 사 오거나, 명동 중국 대사관 앞에 있던 화교들이 하던 가게에서 샀었다. 묘조 같은 연예 잡지가 엔화로 500엔인가 했는데, 한국서는 7000원 정도 했던 듯.
각자 좋아하는 멤버들이 다른 친구들끼리 한 권 사서 사진을 나눠 가졌다. 최애가 겹치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내가 좋아하는 A와 친구가 좋아하는 B가 양면에 겹쳐서 있을 때가 위기였는데, 서로 합의하에 잘 나온 멤버 사진으로 가져가고는 했다. 시험 끝나고 명동 나가면 버거킹 가서 햄버거도 사 먹고 (베이컨 더블 치즈버거를 제일 좋아했음. TMI), 즉석 떡볶이를 자주 먹었다. 중간고사 끝나고 친구 무리들과 이렇게 명동, 강남역 놀러 다니던 것이 소소한 추억. 강남역 뉴욕제과랑 타워레코드 기억나시는지. 이런 시절 이야기하자니, ‘응답하라 1994’야 뭐야. 아 세월이여.
대학생이 되어서는 워킹 홀리데이라는 비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 가서 사는 것이 꿈이었다. IMF 전에는 학교에서 호주나 캐나다로 조기 유학을 가는 애들이 종종 있었다. 소시민의 딸들인 나와 친구들은 굳건히 한국 땅을 지켰지만, 중학생 조기 유학이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친척들이 이민 가있는 친구들은 좀 더 부담 없이 떠났다. 엄마한테 “나도 호주 보내줘.” 했다가 등짝만 맞고 끝나기는 했지만, 언젠가 외국에 가서 살아보겠다는 야심은 가슴속에서 불타고 있었다. 대학생이 되었고, 이때도 휴학하고 호주나 캐나다에 1년 정도 어학연수를 가는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 집은 유학 보내 줄 형편까지는 안 되었지. 그럼 뭐가 있을까 하다가 찾게 된 것이 일본 워킹 홀리데이 비자였다. 뭐? 현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살면 된다고? 오. 세상에 이런 비자가.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서 일본에 가기로 혼자 결정했다. 일본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일본어를 잘해야겠지!? 영어 공부도 YBM에서 했다고 했는데, 일본어도 YBM에서 기초반을 다녔다. 시사일본어나 파고다는 한 번도 안 간 YBM 마니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충성 고객이었다. YBM에 가서 기초반 2개월을 다니면서 문법을 배우고, 회화반을 2개월 다녔다. 외국어 공부하는 것은 원래 좋아했고, 점점 일본어가 이해가 되면서 드라마에서 모르던 표현들이 귀에 들리는 것이 재밌어졌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봐야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를 원서로 읽어야지. 고등학교 때 우리 집에 놀러 온 남순이 이모에게 일본 아이돌 그룹 가사를 내밀면서 무슨 뜻인지 알려달라고 했었다. 이모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한 줄씩 번역해 주셨다. 지금으로 치자면, 음... ‘아이브’ 노래 가사 번역 해 달라는 미국 사는 조카를 바라보는 심정이랄까. 그 유치한 가사를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내가 그 가사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자, 이모한테 참 못할 짓을 했구나 싶었다. 희희.
어느 날, 친구인 희진이가 자기 일본어 회화 다니는데 같이 가겠냐고 물어봤다.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 주부가 집에서 애기들만 보기 무료해서, 일본어 배우는 학생과 프리토킹 수업을 하신다고. 선생님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도 초급 수준이라 한국어 반, 일본어 반. 애기들 놀아주면서 한 번에 두 시간씩 일주일에 두 번씩 갔었다. 희진이는 학업이 바빠서 먼저 그만두고, 나는 그때 휴학 중이어서 6개월간 선생님과 공부했었다. 학원에서 다대일로 회화 수업을 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일대일로 공부하니 실력이 쑥쑥 늘었다, 암기로 영어를 외울 때와는 다르게, 일본어는 아이가 모국어를 배우듯이 자연스럽게 습득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이때 일본어 실력이 한 단계 올라간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애니메이션 오디오 CD였다. 일본어 펜팔로 알게 된 오사카 사는 치하루 언니가, 내가 좋아하는 만화책의 오디오 CD를 2장을 선물해 줬었다. ‘kiss’ 하고 ‘눈가리개의 나라’. 성우들이 만화의 장면들을 연기하는 구성이었다. 분량은 50분 정도. 대화 내용이 전부 이해는 안 가지만 배경음처럼 계속 틀어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기하게도 대사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것 아닌가. 아이가 말을 배울 때처럼 귀가 트였다고나 할까. 공부를 할 때, 드라마 1-10회를 한 번씩 보는 것보다, 1회를 열 번 보는 것이 더 효과가 있겠다고 느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해가 가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원어민 선생님과 일대일로 공부를 한 덕에 회화가 두렵지는 않은 상태에서, 도쿄로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수 있었다. 24살에 도쿄에서 겪은 8개월간의 이야기는 다른 편에서 써보기로 하겠다. 한국으로 귀국을 한 뒤에는, 일본어를 잊지 않기 위해 또 YBM에 가서 가끔씩 회화 수업을 듣고, 일본 드라마나 쇼프로를 보았다. 이때쯤에는 다음 카페에서 일본 영상들을 10분씩 토막토막 올려주는 업로더들이 있어서 편히 볼 수 있었다. ‘1리터의 눈물’이라는 드라마가 유명하던 시절이었다. 예전에 비디오테이프 복사하던 때에 비하면.. 라떼는
말이야...
28세에 다시 일본으로 갔을 때는, 받을 수 있는 비자가 어학원 비자 밖에 없었다. ‘내 실력에 어학원 레벨 테스트정도야.’ 라며 자신 있게 임했다. 상위 클래스로 배정되었는데, 복병은 한자였음을. 학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 후에 한자 시험을 봐야 했다. 최저 점수를 넘어야만 귀가할 수 있었는데, 맨날 문 닫고 나가는 학생 1. 회화나 독해 수업과는 달리 한자는 우직하게 외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학생 1. 그게 바로 나예요.
한국어를 알려드리며 친해진 이자와상, 유리상이라는 일본 분들이 있었는데, 그중 이자와상이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보돌씨는 요령이 좋다고나 할까. 80%만 해도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오니까 거기에서 만족하고 머무는 경향이 있어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니. 나에 대해 뭐를 안다고 그래요.’라고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이 아저씨는 나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음을. 역시 나이는 헛먹은 것이 아니다. 어학원 수료하는 날까지, 선생님들께 “최상. 제발 한자 좀 외워요.”라고 잔소리를 듣고 끝났다. 대체적으로 성실하지만, 성실하지 않은 어떤 부분. 잠재력의 역치를 넘기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던 젊은 날이었다. 뭐, 이런 모습도 나, 저런 모습도 나 아니겠는가. ‘한자를 외우는데 늦은 나이라는 없다. 지금이라도 외우자.’라고 쓰고는 또 안 외울 듯. 방통대 일문과에 들어가서 억지로 숙제라도 해야 되나 싶다.
일본에서 다녔던 회사는 몇몇 외국인 직원들 빼고는, 전부 일본인이었다. 회사 선배였던 케이코랑 6년간 하우스 메이트로 지냈으니 집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하는 환경이었다. 친하게 지냈던 히로미 선배도 일본인. 시드니에서는 실패했던 현지화 전략이 도쿄에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매주 불금에 은영이와 한인 타운에서 삼겹살과 닭발을 먹는 것으로 한 주를 마무리했었지. 일본 현지화 전략은 반만 성공한 것으로. 아니지. 반이나 성공했던 것으로, 긍정적으로 적어보겠다.
글쓰기 강좌에서 글의 마무리를 교훈적으로 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꾸 교장님 훈화말씀처럼 끝나네.
교훈도 병이다,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