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근로자 보돌]
일본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은 다음, 03년에 1년간 휴학을 하고 도쿄로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학기 중 주말. 가락시장에 주꾸미를 사러 간 아빠가 집에 돌아왔는데, 걸음걸이도 이상하고 말도 어눌한 것이 아닌가. 엄마가 급하게 아산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갔더니 가벼운 뇌경색이 왔다고 했다. 다행히 병원에 빨리 가서, 2주 정도만 입원하고 퇴원을 하셨다. 퇴원은 했지만, 집안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학교는 곧 중간고사 시작이고, 내 워킹 홀리데이 비자는 03년 11월까지 일본에 가서 재입국 비자를 받아야만 연장되는 상황이었다. 아니면, 비자 발급으로부터 1년이 지나서 휴지 조각으로 끝. 내가 비자를 받을 때는 일본 워킹이 인기가 높아서, 경쟁률이 있는 편이었다. 호주는 신청만 하면 나왔지만, 일본은 신청서와 계획서를 일본어로 작성해야 했다. 계획서 열심히 써서 받은 비자인데 휴지 조각으로 날릴 수는 없지. 도쿄에 가겠다고 쇼코 선생님이랑 일본어 회화 과외도 했단 말이야.
머리를 굴린 끝에, 당시 오사카에 거주 중이었던 지인의 집으로 전입신고를 하고, 몇 달 뒤에, 2학기 끝나면 도쿄로 가서 주소를 옮겨가기로 했다. 엄마 졸라서 항공권을 끊고, 학기 중에 2박 3일로 오사카로 떠났다. 마침, 그 기간에 전공 수업 시간 발표를 해야 했다. 교수님한테 비자 때문에 결석하는 건에 대해 횡설수설 설명 드렸는데, ‘너 대체 뭐라고 하는 거니?’라는 얼굴의 물음표가 아직도 기억난다. 엄마한테도 혼나고, 교수님한테도 혼나고, 아빠는 아프고. 속상했던 23세의 나. 속상은 속상이고, 할 일은 할 일이지. 여차저차, 오사카에 도착해서, 무사히 전입신고를 했다. 지인 분이 같이 올 수는 없어서, 혼자 구청에 갔었다. 여행으로 일본에 온 적은 있지만, 구청에서 이런 실전 회화를 하다니. “나는 이사를 하러 일본에 왔스므니다.” 거의 이 수준. 지금 생각하면 별 일도 아니지만, 그때는 구청 직원과 이야기하다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볼 일을 마치고는, 지인을 만나서 커피 한 잔 하고, 부탁받은 담배 한 보루 선물 드리고는 바로 다음 날 한국으로 귀국했다.
DAUM에 일본 워킹홀리데이 준비하는 사람들의 카페 모임이 있었다. 04년 3월에 같이 떠날 룸메이트 언니도 여기서 만나게 되었다. 3살 차이의 언니와는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도쿄로 가기 전에도 몇 번 만나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친하게 지냈다. 룸메 언니는 남자친구가 일본인이어서, 일본에 가는 것이었다. 나는 왜 가는 것인가? 20대 초반부터 일본에 가서 1년 살아보고 싶었다. 좋아하는 가수들 콘서트도 가고 싶고. 그런 어린 마음. 04년 3월 29일. 룸메 언니와 나는 도쿄에 도착했다. 이민 가방 돌돌 굴리며 가는데 어찌나 무겁던지, 나중에 보니, 이민 가방의 50%는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엉엉. 어디 아프리카 오지에 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바리바리 싸들고 왔는지. 언니 남자친구가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서, 나카노에 있는 셰어하우스까지 길을 헤매지 않고 올 수 있었다. 이때는 스마트폰이 있나 뭐가 있나, 주소랑 출력한 지도 한 장만 들고 전봇대에 적힌 번지수 찾으면서 다녔단 말입니다.
JR 나카노역에서 도보 20분, 세이부신주쿠선 카미타카다역에서는 도보 7분 거리에 있던 셰어하우스. 대만 출신의 여성 (하쿠상)이 1층, 뉴질랜드 출신의 영어 선생님 남성이 2층 (서양인 크리스), 인도네시아 화교 출신 부잣집 청년이 2층 (얘도 크리스였음. 부자 크리스). 그리고, 1층 현관문 바로 옆에, 오 마이 러브. 나의 안경군이 살고 있었다. (안경을 쓰고 있어서, 애칭으로 안경군이라고 나랑 언니가 불렀었다.) 안경군은 홍콩계 스코틀랜드인으로, 런던에 있는 글로벌 기업에 입사 합격을 받아두고는, 용돈도 벌 겸해서 일본에 영어 선생님으로 반년 정도와 있었다. 가물가물한데 나보다 한 살 많았던가, 어렸던가. 그렇게 좋아했는데 이젠 기억도 안 나는구나.
제 이상형을 말씀드리자면, 곱게 자란, 상냥한, 똑똑한, 도련님 스타일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바로 이 문간방의 안경군이 나의 이상형에 딱 들어맞는 것 아니냐고요. 그의 영어 이름은 윌리엄이었다. 같은 집 사람들은 다 ‘윌’이라고 불렀었다. 이름까지 귀족적이야. 우리 윌리엄 왕자님. 룸메 언니가 한국에서 ‘연금술사’라는 책을 가져왔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그것이 실현되도록 도와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단 말입니다. 꿈과 희망을 심어준 ‘연금술사’. 그리고 결국은 실망을.
간절히 원하는 것은 안경군의 마음.. 마음을..!! 수치사할 것 같아서 더는 못 쓰겠다.
프라이버시를 중요시 여기는 외국인답지 않게, 컴퓨터가 없던 나와 룸메 언니를 위해 출근할 때 방문을 잠그지 않고, 언제든지 자기 방에 가서 컴퓨터를 써도 좋다고 했다. so sweet. 하루는 그가 하우스 공용 인터넷이 너무 느리다고, 함께 나카노역 앞에 있는 인터넷 회사에 가서 이야기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KT 대리점 같이 가서 인터넷 회선 개설을 문의했던 것. 그는 일본어는 거의 못해서 나를 통역으로 데리고 갔었다. 문의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안경군이 고맙다면서 프레쉬니스 버거에서 햄버거를 사줬다. ‘아, 연금술사 열심히 읽은 보람이 있구먼’ 은 나만의 망상이었고, 그냥 햄버거 사준 사람 1. 왜냐하면, 안경군은 언제부터인가 매주 금요일이면 롯폰기 클럽에 갔다가 하나가 아닌 둘이 되어 집으로 귀가했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외출하려고 현관문 앞에 서면, 안경군 구두 옆에 하이힐이 놓여있고는 했었다. 간절하게 원하면 이루어진다면서요. 내가 언제 다른 여자 구두를 염원했냐고요. 이렇게 나의 짝사랑은 짜게 식어갔지만, 하우스 메이트로는 끝까지 나이스 했었기에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가 나보다 먼저 영국으로 귀국을 했는데, 귀국 마지막 날에 룸메 언니랑 셋이 사진도 찍었다. 예전에 강릉 집에서 그 사진을 다시 봤는데, 세상에 난 잠옷 입고 사진 찍었더라고. 내가 안경군이어도 롯폰기에서 하이힐 신은 여자 만나고 싶겠네. 옷이라도 갈아입고 찍을 것이지. 이것아.
나머지 하우스 메이트들은, 뉴질랜드 크리스는 조용하고, 분재가 취미인 영어선생님. 도시락으로 맨날 고야, 두부, 계란 볶음을 싸서 다녔던 기억. 공용 공간의 쓰레기통도 잘 비워주고, 나이스 가이였다. 크리스도 일본인 여자 친구가 가끔 왔었는데, 현관의 그녀의 신발은 신경도 안 쓰였던 것 보면, 관심 있는 일이 아니면 보이지도 않는구나. 안경군 구두 옆의 하이힐은 외출하면서 앞코를 살짝 밟고 나가기도 했는데 말이다. 희희. 화교 크리스는 인도네시아 부잣집 아들이었는데 미국에서 살다가 갑자기 일본에 와서 어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저거 저거, 미국에서 사고 치고 도망 온 것 아니냐’며 나랑 언니는 추측하곤 했다. 우리 집에서는 몇 달 안 지내다가, 방을 얻어서 나갔다. 자꾸 집안에 신발 신고 다녀서 질색이었지만, 성격이 재밌고, 나랑 언니한테 맛있는 것을 사줘서 나름 잘 지냈다. 안경군과는 성격이 상극이라 둘이 영어로 대화가 됨에도 잘 어울리지는 않았다. 아니면, 나만 몰랐지 둘이서 같이 롯폰기 클럽 다녔던 것 아니냐.
부엌 옆에 있는 방을 쓰던 대만 여성은, 성이 백 씨여서, 일본어 발음으로 하쿠상이라고 불렸다. 대만식 중국요리를 가끔 해줘서 만두를 얻어먹고는 했다. 도쿄대 건축과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세미나에 구경 오겠냐고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나야 아르바이트 안 가는 날은 할 일 없으니까 ‘그럼 가 봅시다.’ 하고 따라갔다. 아니 내가 건축과 세미나 가서 대체할 게 뭐람. 도쿄대는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가 봤다. 강의실 뒷자리에 앉아있었더니 교수님이 “자네는 누구인가”라고 의문을 가졌다. 일본 나이로 22살. 지금 보다 더 닥종이 인형같이 생긴 얼굴로 앉아있었으니 어디 고등학생으로 보였을 듯. 하쿠상이 “하우스 메이트인데 견학 왔다.”라고 했더니 교수님도 그 뒤로는 별 말 안 했다. 얼결에 들어간 세미나에서 두 시간 정도 토론 수업 듣다 나왔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던 기억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도, 내가 도쿄대 건축과 수업을 언제 어디서 들어보겠냐.
학교 하니까 생각나는데, 안경군과 썸을 타던 일본 아가씨가 있었는데 (하쿠상이 주최한 하우스 파티에 놀러 왔다가 눈이 맞았지!) 집에 몇 번 놀러 와서 나와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자기가 소학교 기간제 선생님인데 견학을 오겠냐고 하는 거라. 학교 개방일이라는 이벤트가 있었던 모양. (나만 보면 학교 구경 시켜주고 싶어 지나. 대학교에서 소학교까지.) 일본 소학교가 궁금하긴 해서 또 따라가 보았다. 시골도 아니고 도쿄도 나카노구에 있는 학교였는데 한 학년에 두 반 밖에 없었다. 한 반에 학생도 20명 정도였던가. 와. 일본의 고령화 사회와 인구 절벽을 이때 체감했는데, 요즘은 우리나라도 학급 수 엄청 적더라. 나 때는 한 학년에 16반까지 있었는데. 오전반, 오후반 수업 기억 하시나요? 가서 점심으로 일본 초등학생들 급식도 같이 먹고, 수업하는 모습 뒤에서 구경도 하며 재밌는 하루를 보냈다. 나만 의식하는 사랑의 라이벌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외국인 문화체험도 시켜준 착한 아가씨였구나 싶다.
나는 안경군과 페이스북 친구가 아니었고, 룸메 언니는 친구여서 종종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런던에서는 회사를 길게 안 다니고 다시 일본으로 왔다고. 06년에 내가 도쿄에 놀러 갔을 때 언니가 연락을 해서 셋이서 신주쿠 나카무라야에서 저녁을 먹었다. 언니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 끝나고 바로 취업을 해서 도쿄에 계속 살고 있었다. 입고 나간 옷이 맘에 안 들어서 당일에 GAP에 가서 회색 스웨터까지 새로 사 입고 나갔다. 바로 입고 갈 것이라며, 탈의실에서 스태프한테 택을 잘라달라고 할 때 가슴이 두근두근. 한국 귀국 후 쌍꺼풀 튜닝도 했고, 잡지사 다니면서 한약 다이어트도 해서 나름 ver.2.0으로 만났지만, 아무 일도 없이 옛날 얘기만 하다가 헤어졌다. 쳇, 시시해라.
언니가 “보돌이 얼굴 달라진 것 같지 않아? 예뻐졌지?”하면서 짓궂게 나의 쌍밍 아웃을 하려 했다. 안경군이 그 말을 듣고 쓰윽 나를 쳐다보는데, 이미 내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 집에 가는 길에 언니 팔뚝을 꼬집으며 응징했다. 나한테 꼬집혀 본 사람은 아는 공포의 팔뚝 꼬집기. 정말 아프거든요. 몇 년 뒤에 룸메 언니가, “오래간만에 페북을 봤더니 안경이도 아저씨 다됐더라. 결혼도 한 것 같던데. 사진 보여줄까?”라고 물어보기에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겠어.”라며 거절했다. 아저씨가 된 안경군은 전혀 궁금하지 않다고요.
도쿄에서 만났던 나의 짝사랑은 이렇게 끝났다. 한동안 ‘연금술사’책 표지만 봐도 열이 받았었다. 간절했었는데요. 예!?! 언니가 하필 그 책을 가지고 일본에 왔던 것도 재밌는 에피소드. 우리 모두 청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