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근로자 보돌]
초반 3개월 월세와 생활비는 준비해서 왔지만, 아르바이트를 어서 구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라고는 만화책 신간을 빨리 빌리고 싶어서, 만화 대여점에서 3개월 동안 해 본 것이 다였다. 한국도 아니고, 일본에서 프로 알바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구직 전화 해 보는 것도 무서웠다.
내가 있던 당시는 워킹으로 간 친구들은 대략
1. 일본 유학 동호회에서 유학생이나 워홀러들이 귀국하면서 넘기는 일을 받아서 하는 것.
2. 타운워크 같은 구직 광고 잡지에서 정보를 보고 전화해서 문의하는 것.
일본어로 의사소통 하는 것도 아직은 어색한데, 전화통화는 난이도가 높잖아요. 요즘 한국에서도 젊은이들이 전화 통화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는데, 사실 나도 싫어한다. 타운워크는 일본인들도 보는 잡지라서, 더욱 긴장되었다. 한 1개월 정도는 열심히 놀다가, 룸메 언니가 유학생이 넘긴 편의점에서 일을 시작했고, 나도 이제 슬슬 밥값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핸드폰을 프리페이드폰으로 사서, 통화료가 비쌌기에 문의전화는 공중전화에 가서 했다. “모시모시(여보세요) 타운워크를 보고 전화했는데요.”라고 말하면, 전화 너머에서는 침묵이 먼저 찾아왔다. ‘이 외국인은 뭐지’라는 뉘앙스로 빠르게 답변을 블라블라 해 주면, 반은 못 알아듣고 전화를 끊던 일이 다반사. 전화를 끊고 공중전화기 앞에 있던 회전 초밥 집에 빨려 들어가서 6 접시 먹고 나왔던 날도 있었다. 눈물 젖은 게맛살 마요 군함말이와 연어와 광어 등등. 집에 걸어가는 길에 슬픔에 쓰러질까, 탄수화물 보충을 야무지게 했지.
일본에 오기 전에 쇼코 선생님이랑 ‘아르바이트 구직 문의 전화’ 시뮬레이션 공부까지 하고 왔는데, 선생님이랑 할 때와는 달리, 실전에서는 내가 예상한 대답을 상대방이 하지 않았습니다. 못됐어 정말. 열 번쯤 거절당한 이후로는 해탈해서, 잡지를 보다가 눈에 보이는 대로 전화를 걸고는 했다. 내 발음만 듣고 “공고 마감 되었습니다.”하고 끊기기도 하고. 나카노역 ‘유니클로’에서는 일본어가 부족해서 채용 못하겠다고 대놓고 까이기도 하고, 타코야키 굴리는 게 재밌어 보여서 역 앞 ‘긴다코’에도 지원해 볼까 하다가 말았다. 덕분에 악감정 없이 단골로 남을 수 있었지. 요즘이야 한국, 일본 다 일손이 모자라서, 누구든지 환영이지만, 04년 도쿄에서는 지금보다는 외국인이 일을 구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역으로 걸어가는 길에 있는 라멘 집에서 오전 10시~오후 3시까지 런치타임 아르바이트를 구한다고 공고가 붙었다. 기본은 라멘집인데, 저녁에는 이자카야로 변신하는 가게였다. 기대 없이 전화를 했는데, 점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오. 이름이 외국인이네. 집은 근처야? 그럼 오늘 런치 시간 끝나고 이력서 들고 와 봐.”라는 것 아닌가. 면접을 가니, 30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체인점은 아니고 개인이 하는 라멘 가게로 오너 점장인 나카무라상. 알고 보니, 아버지가 재일교포 2세, 어머니는 일본인. 자기도 반은 3세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다음 주부터 런치타임 담당으로 잘 부탁한다고 마무리. 동네라서 가기 편하고, 점심으로는 라멘도 준다고 하니 밥값도 굳고 좋다면서 출근을 했다.
인수인계는 하루 받았는데, 알려주신 분은 작은 체구의 전형적인 일본 미인 스타일이었다. 점장님이랑은 반말로 대화를 나누면서 친밀해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점장님 부인이었다. 둘이서 이혼수속 중이어서 런치타임에 일 할 사람을 대신 찾게 된 자리에 내가 들어가게 된 것. 아니, 이런 사연이 있을 줄이야. 이혼 스트레스 때문인지, 원래 성격인지, 나카무라상은 말을 거칠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둘 다였던 것 같다.
일도 안 해봐서 낯선데 외국이기까지, 2주 정도는 울면서 다니다가, 차츰 익숙해져 갔다. 라멘이 나오면 테이블까지 가지고 가야 했는데 국물은 넘칠 듯 찰랑거리고, 그릇은 왜 이리 뜨거운지. 긴장한 손가락으로 열심히 날랐다. 완탕멘, 탄탄멘, 교자가 맛있어서 매일 점심으로 먹어도 안 질렸었다. 점심 스탭밀로 교자는 안 구워줬지만, 가끔 저녁 타임 알바로 들어가면 “최상, 오늘 교자 먹을래?” 하면서 만들어주고는 했다. 성격이 들쑥날쑥 하기는 했지만, 나중에 사회생활 하다 보니, 사장이나 팀장들은 대체로 다혈질이더라. 그러려니 하고, 귀국하기 직전까지 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프트가 겹쳐서 가끔 같이 일을 했던 이이무레상은 댄서로 일하면서 아르바이트 2개를 하고 있었다. 저녁 타임에 일하던 20세 남자아이는 고등학교 때 방황하다가, 이제 맘 잡고 직원으로 일하고. 공무원 같이 얌전하게 생겼던 야마자키상은 대형 오토바이를 타고 도코로자와에서 나카노까지 출퇴근을 해서 놀라기도 했다 (거리가 꽤 멀다). 이 분도 왕년에 과거가 화려했던 듯. 한국에서는 만날 일이 없었을 다양한 사람들과 일하면서, 이것이 ‘워킹과 홀리데이’로구나라고 생각했다. 나카노 상점가에서 열리던 동네 마츠리에 다 같이 참가해서 공짜 맥주와 오이 절임을 실컷 먹었던 날도 기억난다.
라멘 육수를 내기 위해 항상 멸치 내장을 제거해야 했는데, 손님이 없을 때는 주로 이 작업을 했었다. 손이 빠른 내가 멸치의 달인으로 거듭나니, 동료들이 칭찬해 줌 > 신나서 더 열심히 손질함의 쳇바퀴를 돌았다. 일 시키기 참 쉽죠? 어느 날은 멸치를 까다가 화장실에 갔는데, 얼굴이 글리터 메이크업을 한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손 씻으면서 웃었던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한국에서는 나름 곱게 자랐는데, 여기서 멸치 비늘로 화장을 하고 있구나.’ 그래도, 내가 번 돈으로 자립한 이 생활이 자랑스러웠다.
4월부터 11월까지 근 7개월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심히 출근 한 나를 위해, 나카무라상이 귀국 전에 프렌치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준다는 것이 아닌가.
“예? 둘이요?”
“최상, 무슨 그런 소리를! 내 여자 친구랑 셋이 가는 거야. 으하하.”
점장과 가는 것도 어색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새 여친이랑 셋이 밥을 먹는 것은 무슨 경우인지. 하지만, 공짜 프렌치라니 안 갈 수 없겠죠. 다카다노바바에 있는 ‘리가 로열 호텔’에 가서 런치 코스를 먹었다. 난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점장 ‘전 부인’에서 ‘현 여친’까지 다 만나보게 되는 것인가. 다행히, 여친 분은 그와는 달리 사근사근한 성격이라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전 부인은 아담한 일본스타일 미인이었다면, 현 여친은 키가 큰 글래머 미인이었다. ‘아니, 이 아저씨는 무슨 능력으로 미녀들만 만나는 것이냐.’ 후식 디저트 플레이트에 ‘그동안 수고했다’는 메시지를 부탁해서 적어 준 것을 보고는 조금 감동했었다. 츤데레라서 여자들이 꼬였나? 알 수도 없지만, 알고 싶지도 않던 그의 매력 포인트. 웨이터님이 폴라로이드로 우리 셋의 사진도 찍어줬는데, 부부와 사촌 여동생 정도로 보였으려나 싶다.
06년에 도쿄에 놀러갔을 때, 저녁시간에 그때 점장은 없고, 이이무레상이 있어서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고 완탕멘을 먹고 왔었다. 그리고는, 09년에 일본에 살 때 회사 일 때문에 나카노에 갔었다. 예전 가게 자리를 들러봤더니 다른 가게가 영업 중이었다. 추억의 한 페이지가 닫힌 것 같아서 섭섭했다. 그 집 교자랑 완탕멘 진짜 맛있었는데 말이다.